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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라 Feb 26. 2022

텔레비전을 보며 아이는 어른이 된다.



어릴 때. 그리니까 초등학교과 중학생의 중간쯤 되던 시기. 아이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니던 그 시기에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거실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거였다. 나는 봤던 드라마를

또 보고 봤던 영화를 또 봤다. 봤던 광고를

또 보고 예고편을 홈쇼핑을 유료 케이블의

채널 안내 문구를 보고 또 봤다. 애국가만은 보지

않았는데. 애국가를 보면 나의 하루가 얼마나

무의미한지가 증명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국가가 나올 때면 나는 채널을 돌렸다.

이 채널에서 하지 않는 방송을 저 채널에서는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잠들지

않아서 나는 밤새도록 봤던 것들을 계속 봤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면 나를 텔레비전을 끄고 잠든 체를 했다.


텔레비전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할머니다.

할머니와 텔레비전은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돌아가신 이모할머니는 이태원에 살았는데

그래서 우리는 할머니를 이태원 할머니라고 불렀다.

살아계실 때 할머니가 하는 일은 주로 텔레비전을 보는 거였다. 그건 나도 잘하는 일이라서 나는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텔레비전을 봤다.

할머니는 골다공증과 허리디스크가 심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셨고. 밤에는 화장실도 못 가시고 방 귀퉁이에 있는 요강으로 겨우 가실 수 있었다.


할머니가 건강할 때 할머니는 권사였다.

할머니는 아프기 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갔다. 더 이상 제대로 걸을 수가 없기 전까지 교회에 갔다.


할머니가 아프고 나서 교회에서는 할머니에게

공로상으로 순금으로 된 황금열쇠와 상장 같은 것을

주었다. 할머니는 모든 시간과 전재산을

거의다 교회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교회 사람들은 그 순금열쇠로

모든 셈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아픈 할머니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밥상에 앉을

때마다 우리 자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 기도를

하셨다. 나는 가끔 실눈을 뜨고 밥그릇을 내려다봤다.

기도가 끝나고 아멘이라고 모두 함께 말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고 나서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이모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나는 일본에 있는 내 친할머니의 손녀였고

할머니에겐 언니의 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종종 거실에

있는 담비 목도리나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여주며 이것들은 할머니가 죽고 나면 다 나에게

물려줄 재산이라고 했다. 할머니 집도.

할머니 집 옆에 세를 놓고 있는 미용실건물도 말이다.

할머니는 내가 성인이 돼서 대학에 가면 주려고

등록금을 모아둔 통장도 여러개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치매를 오래 앓았고 결국엔 모든 게

사라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쯤에는

다이아반지도 담비 목도리도 집도 미용실도

어딘가에 있다던 내 대학 등록금 통장도 사라졌다.

치매에 걸리시기 전에도 치매에 걸리신 후에도

할머니는 나에게 줄 통장이 있다고 끊임없이 말하셨다.


대학교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각했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 십수 년간 모았던

등록금 통장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하고 말이다.

나는 통장을 보지 못했고

할머니는 내가 대학에 가는 것도

내가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셨다.


아무튼 치매에 걸리시기 전에 할머니는

늘 나와 텔레비전을 보며 말했다.

텔레비전은 할머니의 애인이고 가족이라고 말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노후를 할머니는

그대로 살고 있었다. 남편도.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없이 종교와 텔레비전으로만 위안을 얹는 삶.


나는 가끔 할머니 댁에 가서 같이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보다

외로운 사람은 없다는 걸 말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나면 결국엔 시간만

남는다. 망망대해 같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누구는 기도를 하고 누구는 텔레비전을 본다.


요즘 나는 티브이를 보지 않는다. 몇 달째인지 모르겠다.

그럼 무얼 하냐고? 일을 한다. 일을 하거나 밀린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냥 외로워한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외로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냥 외로워한다.


나는 그것들이 그냥 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


가끔 나는 이태원에 간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곳이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한다.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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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3월에 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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