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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a 윤집궐중 Feb 08. 2022

42. 개별적 존재, 사람

산수유 5_ 박완서 장편소설「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이어지는 2부 이야기로 작가가 스무 살 무렵에 겪은 6,25 전쟁의 체험담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 이미 접했던 내용과 겹치기도 하고 조금씩 어긋나기도 해서 읽는 내내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동일한 인물과 사건이 작가의 상상력과 소설적 배치로 인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서로 다른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다 보니 박완서라는 작가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점점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6,25 전쟁 당시', '인공 치하', '서울'이라는 시공간이 갖는 특수성과 가족 구성원의 이력으로 인한 처지가 맞물리면서 벌어지는 상황은, 처절하고 참담하다. 작가는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을 생생하고 집요하게 그려낸다. 심리묘사는 솔직하다 못해 탁월하고, 비극적 서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까칠하고 담담하다. 경험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에서 나온 냉정한 서술로 인하여 상상을 뛰어넘는 비극적 서사가 자기 연민이나 과장, 미화, 감상 따위를 동반하지 않은 채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겉돌지 않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실존의 문제를 파고들며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생존과 인간다움의 조건', '이념과 삶의 관계'를 생각했다. 인간은 빵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 동시에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로서 소중한 이념이, 적극적으로 삶을 이끌고자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싸잡아 능멸하는 고약한 버릇'은, 인간과 삶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다. 사람은 독특성과 히스토리를 지닌 '개별적 존재'이며, 삶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전체의 모습을 본 일이 없는 '총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경우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修辭立其誠

세계에 관한 진리를 알고 
그것을 말로 충실히 표현할 때 
誠이 확립된다. 

[주역_ 문언전]


매일 글을 읽고 써야 하는 이유, 

우리가 서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

''의 자세로 세상을 대해야 하는 이유

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놈의 나라가 정녕 무서웠다. 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 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 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어쩌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찍한 세상에 꼼짝 못 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아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엄마는 눈에 눈물이 그렁하면서 입을 못 다물고 웃고 있었다. 올케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돈다발을 만져보고 넘겨보면서 얼굴 하나 가득 웃음이 번졌다. 엄마가 먼저 병원 약 한 번 못 써보고 죽은 아들을 불쌍해하며 눈물을 찍어냈지만, 40만 원이 회복시켜준 생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자는 아이들까지 어제보다 훨씬 영양이 좋아 보였다. 천 원짜리 돈다발이 퍼트린 시퍼런 생기가 고목나무에 물오르듯이 이 집을 변화시키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잘난 척하거나 특별 대우받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뭣하러 자신이 간판장이가 아니라 화가라는 걸 나에게만 살짝 밝힌 것일까? 그런 의문은 덤덤한 사람이 낸 수수께끼답게 당장 풀리지 않고 서서히 풀렸다. 그에 대한 친근감과 동류의식은, 나는 이 안에서 유일한 서울대 학생이다, 적어도 서울대 학생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전락했나 따위 우월감과 열등감의 콤플렉스에서 놓여나는 데 힘이 되었다. 우리 초상화부에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도처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을 거라는 호기심도 생겨났다.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싸잡아 능멸하던 고약한 버릇에서, 개별적으로 볼 수 있는 관심과 아량을 조금씩 회복해갔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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