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벽: 천재들이 겪는 인간관계의 딜레마

나는 점점 나만의 ‘수위 조절’ 방식을 익히게 되었다.

by Youhan Kim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주변 사람들과 미묘한 거리를 느끼곤 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학교에 들어간 이후였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고 대화하는 게 그저 즐거웠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내가 말하는 것과 저 친구들이 듣고 싶은 것 사이에 간극이 있구나”라는 사실을 자꾸만 실감하게 되었다. 수업 내용을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하고, 때론 엉뚱한 의문을 던지면서 혼자만 다른 세상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다가가고 싶어도, 내 말은 곧잘 “왜 그렇게 복잡하게 얘기하냐”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다 보니, 상대가 관심 없을 법한 주제는 아예 입도 떼지 않고, 겉으론 평범하게 보이려 애쓰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집단에서든 큰 모임에서든, 나는 점점 나만의 ‘수위 조절’ 방식을 익히게 되었다. 예컨대 친구들이 좋아하는 얕은 농담만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내 호기심이나 고민을 공유하고 싶을 땐 혼자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뒤적였다. 처음엔 이게 꽤 편리한 전략이라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는 정체 모를 외로움이 쌓였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내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가 이어지니, 정작 중요한 순간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허전함에 빠지는 것이다. 그 허전함은 여럿이 함께 떠들 때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그 순간에도, ‘나는 여기에 정말 100% 속해 있지 않다’고 느끼는 미묘한 소외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높은 IQ를 가진 많은 이들이 비슷한 외로움을 겪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똑똑해서 좋겠다’라는 말을 곧잘 듣지만, 막상 생활 속에서 그런 ‘똑똑함’이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드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주제로 수다를 떨면서도, 머릿속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거나, 나는 이미 한참 다른 각도에서 그 대화를 해석하고 있는 식이다. 누군가는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고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내겐 그게 자연스러운 습관이다 보니, ‘적당히 함께 어울리는 척’하는 데 한계가 왔다. 그래서 실제로는 더 밀착된 유대감이 간절하지만, 느껴지는 건 묘한 거리감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의사소통의 엇갈림이었다. 내가 어떤 주제를 이야기할 때, 대화 상대는 그 의도나 맥락을 바로잡아주기를 바라지만, 정작 나는 각종 전제 조건과 연관 정보를 머릿속에서 동시에 돌린다. 예컨대 간단히 “이 식당 파스타는 조금 짠 것 같네”라고 말해도, 내 안에서는 이미 “이건 이 재료를 썼을 텐데, 그렇다면 일반적인 레시피보다 소금이 많이 들어갔거나, 아니면 면에 간이 되어 있는 상태일 수도 있어. 왜 이 식당은 이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파생되고 있다. 그러니 내 답변은 단순히 “그래, 짜긴 하네”가 아니라, “재료나 조리 과정 등을 감안했을 때…”라는 식으로 길게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상대방은 조금 과장해서 “네가 말하면, 파스타 하나도 논문 쓰듯 설명하네”라며 난처해하고, 나는 “그냥 내 방식대로 공유했을 뿐인데” 하고 서운해질 때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어긋나면, 결국 갈등이나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따지고 보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높아진 인지능력 덕분에 나는 여러 변수를 동시에 검토할 수 있고, 대화 상대는 오히려 단순하고 직관적인 소통을 기대하기에, 둘의 대화 속도가 맞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작은 ‘속도 차이’와 ‘깊이 차이’가 누적되면, 마치 벽을 사이에 두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점차 강해진다는 점이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묵혀두고 “그래, 나도 몰라” 식으로 얼버무리기 시작하면, 내 안에선 “아무도 내 진짜 생각을 알아주지 않는다”라는 좌절감이 커져만 간다.




어떤 사람들은 고지능자가 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조언을 해주며, 리더십을 발휘할 거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도 때도 없이 주변에서 “너는 좀 다르다”라는 낯선 시선을 느끼며 소외감을 경험한다. 학창 시절에도 ‘우등생’ 혹은 ‘천재’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사람들은 괜히 그 아이가 모든 걸 잘할 거라 여기고, 때론 부담스러운 기대를 걸거나, 반대로 무심하게 방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쟤는 공부를 잘하니 신경 안 써도 돼”라는 식으로, 정작 감정적인 문제나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간과하는 경우를 자주 봤다. 그러다 보면 이미 십 대 시절부터, 학습 능력 외의 영역에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며 조용히 마음을 닫아버리는 이들도 있다.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한다’는 장점이 곧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동료들이 팀으로 일하며 조금씩 아이디어를 맞춰가는 순간에도, 나는 벌써 결론을 잡아버리고 “이건 이렇게 하면 되겠네”라고 제안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일부 동료들은 “네 말대로면 간단하긴 하겠다”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뭐 그렇게 날뜀? 같이 고민할 기회를 뺏기는 것 같다”라는 반감을 품을 수도 있다. 이마저도 내가 한번 더 ‘사람 심리를 고려해 말해줘야지’ 하고 브레이크를 걸어주면 좋겠지만, 성격이 급한 편이거나 타고난 논리적 습관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쉽지 않은 법이다. 결론적으로, “잘난 척한다”거나 “팀워크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고, 나는 또다시 “뭐가 문제였지? 난 효율을 말했을 뿐인데”라며 혼란스러워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벽은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상당하다. 자꾸만 “그냥 이렇게 살지 뭐”라며 나만의 세계를 고수하게 되면, 대인관계가 점점 제한적이거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기 쉽다. 가벼운 대화를 할 때야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진짜로 마음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색함이나 서먹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다. 가장 먼저 한 건, 내 이야기를 조금씩 ‘간추려서’ 전달하는 습관이었다. 아무리 머릿속에 복잡한 배경 설명이 있어도, 상대가 원하는 정보만 콕 짚어 얘기하고, 나머지는 ‘상대가 궁금해하면 더 말해주겠다’는 식으로 단계를 두는 것이다. 이 방식은 처음엔 꽤 답답했지만, 의외로 큰 갈등 없이 대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


다음으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이끌어내는 법을 연습했다. 예전의 나는 “이거, 이렇게 하면 돼”라며 정답을 빨리 제시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사람들은 그 정답을 ‘직접 찾아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니 내가 먼저 결론을 말하기보다, “네 생각은 어떠니?” “혹시 이 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있어?”라는 질문을 던져주면, 상대가 나와 속도를 맞춰가며 참여하게 된다. 그제야 진짜 협업이 가능해지면서, 내가 느꼈던 소외감도 조금씩 사라졌다. “나만 너무 앞서가니,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따라온다”는 불만 대신, “우리 모두가 속도를 조절하며 걸어가면, 훨씬 큰 시너지가 나오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고 이 모든 노력이 완벽한 해법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과는 정말로 코드가 안 맞을 수 있고, 내가 아무리 배려해도 상대가 “네가 하는 말은 이해 안 돼”라며 선을 긋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자기 본모습을 감추고 살아가야 하느냐”는 질문도 여전히 남는다. 실제로 높은 IQ를 가진 이들 중에는, “주변에 맞추려 애쓰다가 내가 나다움을 잃어가는 게 싫다”라며 인간관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길을 택하는 사례도 있다. 어쩌면 그 또한 유효한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외로움이 너무나 큰 대가처럼 느껴졌기에, 스스로를 조금씩 내려놓고 ‘조율’하는 쪽을 택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도움이 될까? 앞서 말한 “간추려 말하기”나 “상대 이야기 먼저 듣기” 외에도, 나는 적극적으로 외부 세계에 ‘나를 표현’하는 채널을 늘려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꼭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가 아니어도, 글을 쓰거나, 봉사활동 같은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만들어보는 건 꽤 의미 있다. 단순한 잡담보다 더 구조적이거나 구체적인 공동 목표가 있으면, 대화의 초점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맞춰지고, 개인의 차이는 오히려 다양성을 높이는 장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자기만의 관심사를 살려 동호회나 스터디 그룹에 참여해보는 방법도 있다. 지식이나 취미를 기반으로 한 소규모 모임에서라면, 함께 몰입할 수 있는 공통 주제가 있으니, 나를 이해해줄 사람을 찾기가 한결 쉬울 때가 있다. 거기서라도 또다시 “넌 너무 깊게 파고들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똑같은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펼치며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간 느꼈던 소외감이 상당 부분 해소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때 “왜 나는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내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할까?”라는 자책을 많이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 사고방식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었다. 단지, 그것을 잘 소통하거나, 적절히 개방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대인관계에서 겪는 난관을 ‘내 잘못’이나 ‘상대의 무지’로만 치부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특징을 어떻게 긍정적 자원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편이 훨씬 건설적이었다.




사실 이 보이지 않는 벽이라는 게, 완전히 허물릴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지적 능력뿐 아니라 성격, 환경, 가치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높은 IQ를 가진 이들은 그 복잡한 세계관과 사고방식 때문에 끝내 타인과는 조금은 다른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벽을 조금씩 깎아나가면서, 누군가와의 교집합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건 가능하다. 때론 그 교집합이 얕고 작더라도, 서로에게 진심어린 관심과 신뢰가 생길 수 있다면, 그건 결코 무의미한 노력이 아니다.


내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배운 사실은, ‘인간관계의 딜레마’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해도, 마주 앉아 대화하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어떤 자리에선 “네가 또 너무 어려운 얘기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에선 “내가 생각하는 걸 전부 말하면 상대가 지루해하겠지”라고 고민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 얘기를 ‘궁금해하며 들어주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가령, 열정적인 토론을 좋아하는 대안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몇 시간을 달려도 지치지 않을 만큼 심오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럴 땐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해방감을 느끼며, “아, 이렇게 소통이 되는구나!”라는 기쁨을 만끽한다.


따지고 보면, 보이지 않는 벽이란 건 어느 누구에게나 형태만 달리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성격 차이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문화적 배경 차이로 인해, 벽을 느끼고 살아간다. 다만, 높은 IQ를 가진 이들은 그 벽이 조금 더 높고 단단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듯하다. 그러니 그 벽을 ‘영원히 깨부술 수 없다’며 포기하기보다는, 벽에 문을 만들거나 창문을 내어, 양쪽이 조금씩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이나 창문을 여는 기술은, 자기 이야기의 길이를 조절하고, 상대의 입장을 경청하며, 때론 적당히 ‘줄여 말하기’를 배워보는 작은 습관들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결국, 인간관계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노력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높은 IQ로 인해 유독 ‘다름’을 실감하는 이들이 있다면, 먼저 대화 방식과 관계 맺는 방식을 조금씩 수정해보길 권하고 싶다. 그건 내가 가진 장점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장점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우선 문턱을 낮추고 호흡을 맞춰가자는 제안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한 발 다가간 뒤, 정말 통할 수 없는 상대라면 거리를 지키면 되고, 의외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한껏 그 관계를 즐기면 된다. 그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던 벽이 조금씩 투명해지거나, 적어도 넘나들기 쉬운 구조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단지 똑똑하다는 이유로 외로움을 감수해야 했던 수많은 이들이, 조금 더 따뜻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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