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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Sep 03. 2020

01. 오늘은 또 어디를 퇴사해볼까?

프로퇴사러의 4번째 퇴사

한 번의 휴학도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식날 면접을 본 곳이 나의 첫 직장이 되었다. 집에서 도보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의 회사였는데, 언뜻 조건은 좋아 보였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은근히 무시하는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성희롱적 발언들에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그 후 모두 다른 직종의 회사를 다녔지만, 내 성향과 가장 잘 맞았던 곳은 마지막 회사였다. 매우 큰 규모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탄탄하게 입지를 다지고 있는 출판사였다. 하지만 이곳도 3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퇴사하게 되었다.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하고, 평소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던 나에게 출판사 편집일은 아주 흥미롭고 잘 맞았다.

3년 가까이 일을 해왔지만 한 번도 이 일이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아니, 물론 힘들긴 했지만 그것이 고통으로 오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고 일에 욕심도 생겨, 집에 오면 일 생각이 날 정도였다.
나의 부모님께서도 과거 퇴사 3번이라는 화려한 전적(?)이 있는 내가 아무런 불만 없이 회사를 2년 넘게 잘 다니는 것에 대해 굉장히 안도하셨고, 좋아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일이 잘 맞던 회사를 왜 그만뒀느냐고? 가장 큰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업무 분배와 그 밖의 처우에 대한 부당함.


대학을 졸업하고 약 6년 정도 사회생활을 해오며 나에 대해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나는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신입치고 높은 급여를 주었던 전 직장을 그만두고, 그에 비해 절반의 연봉도 채 되지 않는 박봉인 출판사에 들어와 묵묵히 일해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길 원했다.


물론 처음에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 있었다. 내가 작성한 서평이 홈페이지에 실리고, 독자와 작가의 진심이 담긴 감사 메시지를 받으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힘이 샘솟았다.
그렇게 아무런 불만과 불평 없이 묵묵하게 일만 했다. 이 모든 일은 나와, 우리 팀과, 회사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그렇게….

그리고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동기들보다 빨리 승진할 수 있었고 그들보다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함도 잠시, 나에게도 불만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팀 프로젝트는 팀원 모두의 일이다.'라고 하던 A 팀장은 아침에 출근하면 죽이 잘 맞는 다른 팀의 팀장과 카페에 가 회의라는 명목 하에 수다 떨고 오기 바빴고, 나보다 고작 서너 살 정도가 많았던 사수 B는 나와 동기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요즘 애들은~’하며 훈계를 하기 일쑤였다. 후배들의 행동이 심기에 거슬리면 나를 시켜 쓴소리를 하게 하고, 본인은 앞에서 칭찬만 하는 천사 코스프레를 했다. 그래서인지 점점 온갖 악역은 내가 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 역시 연차가 쌓이며 그들에게 불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출근해서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밤늦게까지 팀 프로젝트 업무가 끝나지 않아 야근을 하는 나의 모습에 비해 6시면 칼같이 퇴근하는 후배가 솔직히 당시엔 얄미웠다.

모든 상황을 보면서도 자신의 일을 ‘부탁’이라는 명목 하에 내게 넘기는 사수 B.


누구 하나 나의 바쁨을 알아주지 않는 듯했고, 묵묵히 일만 하면 만만하고 우스워질 뿐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불만이 쌓일수록 나만 힘들고 스트레스받을 뿐이구나 싶어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팀 일은 모두 이렇구나. 그래, 다 같이 도와가며 하는 거지. 나 혼자만의 일인가? 우리 팀을 위한 일이지!’

그 후 팀 프로젝트를 위해 나 혼자 남아있어도, 상사가 일을 부탁해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하루는 일이 너무 많아 처음으로 후배에게 ‘이 일을 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평소에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이야기하던 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업무까지만 할 수 있어요. 저는 실무만 하는 사람이고, 이런 건 대리님 일이잖아요.”

순간 뒤통수를 맞은듯했고, 눈이 돌아갔다.

'누구는 좋아서 야근하냐? 네 퇴근시간만 중요하고 내 퇴근시간은 무한대냐? 그리고 이게 나 혼자만의 일이야?'


위에선 일을 넘기고, 아래에선 내 일이 아니니 할 수 없단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분노를 터뜨릴까, 말까 시뻘게진 얼굴로 고민하는 사이 후배가 한 번 더 선수를 쳤다.

“저한테 일을 계속 시키시겠다고 하면, 팀장님한테 직접 면담 신청할 거예요.”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후배와 더 이상 논쟁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면담 신청이 하고 싶다면 그러라 했고, 항상 '팀 프로젝트는 팀원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에요.'라고 말하는 사수 A, B가 있으니, 일이 잘 마무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사수 A, B가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예상대로 그 후배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사수 A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O대리가 조금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OO 씨(후배)는 그 일만 하려고 뽑은 사람이에요. 그 외에 다른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죠.”

알바도, 프리랜서도 아니고 정직원 중 ‘그 일만 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게다가 내가 다니던 회사는 인력이 부족해 팀원 중 어느 누구도 한 가지 일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사수 A의 추가 코멘트.

“그리고 OO 씨가 하는 일은 집중을 요하는 일이에요. 앞으로 업무도 더 많아질 거고. 그건 우리가 감안을 해줘야죠.”

집중을 요하는 일? 집중을 요하지 않는 일도 있던가?

더 말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고, 더 이야기하면 ‘그럼 제가 하는 일은 쉬운 가요?’하고 자칫 투정이나 빈정대는 것처럼 들릴 수 있어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항상 팀원들이 자기보다 빨리 퇴근한다고 나에게 그들의 험담을 하던 사수 B도 말과 행동이 180도 바뀌어 버렸다.
너무 황당하여 왜 말이 달라지셨느냐고, 이건 좀 부당하지 않느냐고 나중에 B에게 토로하였지만, 자신보다 더 상사인 A의 말이 그렇다고 하니, 자신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이 있어도 내세우지 못하고, 상사의 의견을 무조건 수용하기만 하는 B가 앵무새 같다고 생각이 들었던 건 그즈음부터였다.  





다 같이 협업하며 힘내서 일할 땐 불만이 생기지 않지만, ‘왜 나만?’싶은 생각이 들 때 불만은 피어난다. 평소 무엇을 먹을까, 어디에서 만날까와 같이 사소한 일에는 우유부단하다가도, 무언가를 그만두고 포기하는 큰일에는 결단력과 실천이 엄청나게 빠른 나는 그렇게 딱 한 달 후 퇴사를 감행했다.

사수 B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것처럼 보였으나, 한 달 전부터 이미 떠날 사람이라는 듯 나를 대하는 표정과 말투에서 이전과는 다른 무성의함이 느껴졌다.
그에 비해 팀장 A는 내가 떠나는 게 무척이나 아쉬운 것처럼 보였다. 상황을 바꿔주려 노력했고,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의 퇴사를 아쉬워해주었고, 퇴사 후에도 좋은 언니, 동생처럼 지내자며 이후에도 쭉 연락을 하자고 했다.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던가. 그래도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A 팀장에게 감동을 받고, 퇴사를 결정한 게 잘한 걸까 조금 고민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퇴사 3일 전, 나는  A 팀장과 B 과장이 나의 험담을 한 메신저를 우연히 B의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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