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해외여행지는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남편과 떠났던 대만이었다. 아무래도 첫 해외여행이다 보니, 여권을 발급하고 여행 계획을 짜는 한 달여가 무척 행복했고 기대되었다. 약 일주일의 여행을 하는 동안 얼마나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날지 출국일이 너무도 기다려졌다. 하지만 그렇게 고대하던 여행은 예상과는 달리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여행이 행복하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
우선 날씨가 한몫했다. 이미 계획을 짜면서 더운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착하자마자 습한 기운과 가만히 있어도 줄줄 흐르는 땀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밤이 되어도 39도에 육박하는 9월의 대만 날씨는 숨이 턱턱 막혔고, 더위에 약한 나와 남편은 여행을 하는 동안 자주 말을 잃었고, 작은 일에도 투닥거렸다.
2) 여행이 행복하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
음식이 입에 잘 맞지 않았다. 물론 맛있었던 것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왕 연어초밥(하지만 이것도 2개까지가 적당. 그 이후로는 조금 느끼하다.)과 엄청나게 높은 당도의 과일이 맛있었다.
실제로 보면 더 큰 대왕 연어초밥
하지만 지우펀에서 무슨 용기인지 한입 먹어본 취두부로 인해 식욕이 뚝 떨어져 돌아오는 날까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또, 가격대가 꽤 높았던 마라 훠궈 식당에서도 입맛이 맞지 않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깨작대다 나왔다.(요즘은 마라샹궈, 마라 훠궈 등 훠궈가 국내에서도 꽤 인기가 많은데, 이건 호불호가 좀 나뉘는 것 같다.) 덕분에 여행을 다녀와서 친구에게 살 빠졌다는 소리도 들었다.
내 입맛엔 영 아니던 마라훠궈....
3) 여행이 행복하지 않았던 세 번째 이유
아마 이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사실 일 년 중 가장 덥다는 9월에 대만을 다녀온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남편의 대만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나와 남편은 정장과 원피스, 구두까지 준비를 하였으나, 수도인 타이베이에서도 결혼식장이 한참 떨어져 있어 길을 헤매게 되었다. 게다가 다음날 아침 7시 출국 예정인 빡빡한 일정이라니.
일주일 동안 엄청난 더위와 말도 안 되는 일정으로 지쳐버린 우리는 결국 식장으로 가는 도중 크게 싸우게 되었고, 식장에 도착해서도 서먹함을 완벽히 숨기지는 못했다. (정작 친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돌아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대만 여행의 마지막은 눈물로 마무리.
최대한 싸우지 않으려 서로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일까. 어쩐지 새로운 곳에 가도 기대되지 않고, 즐겁다는 느낌이 없었다. 여행이 하루 이틀 지날수록 점점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출산하고 예전만큼 몸이 자유롭지 않은 지금의 나는 집앞 공원만 잠깐 산책해도 행복하고 기분이 금세 좋아진다. 내 성격이 그때보다 온화해진 걸까? 코로나 때문에 작은 일상도 감사해진 걸까?
당시 여행이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들을 내 나름대로 생각하여 정리해보았지만,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이유는 따로 있었구나 싶다.
생각해보면 당시의 나는 무척이나예민하고 불만이 많았다. 오랜 직장생활과 삐걱거리는 인간관계에 지쳐 다 내려놓고 싶었던 때였다. 누군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님에도 모나게 받아들이고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갔다.당시의나는 지금이곳만 벗어나면, 이 생활만 청산하면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눈물의 대만 여행과 그 후에 여러 곳을 여행했던 나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어딜 가도 행복하지 못한다.’
-지겨운 회사! 지금 당장 사직서 내고 떠나고 싶어. -한국만 아니면 행복할 것 같아.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어.
실제로 당시의 내가 평소 입에 달고살던 말들이다.
과연 지금 당장 어디론가 떠난다면 행복해질까?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이곳’이기 때문일까?
단지 여행을 가지 못하기 때문에 힘든 걸까? 멋진 풍경으로 사진만 보아도 황홀한 어딘가에선 걱정, 근심 따윈 없을까?
단지 내가 있는 장소만 바뀐다고 해서 내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곳에 머무는 내가 행복해져야, 비로소 어딜 가도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무작정 여행을 떠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었다. 물론 하루, 이틀은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과 들뜬 마음으로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여행을 떠나오기 전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고 별거 없는 소소한 하루도 소중하다고 여기는 요즘은 해외는커녕 집 앞 공원 산책만 가도 웃을 일이 많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번 행복하고 힘듦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일상 그대로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나는 그 이후에 여러 나라를 가보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도 많이 가보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항상 느끼는 것은 하나다.
어딜 가도 행복과 아픔은 공존한다.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 전에, 그것을 인정하고 지금의 자신을 먼저 수용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