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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경 Aug 26. 2020

둘째는 애교가 많다?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우리 집은 언니와 나와 남동생, 이렇게 3형제이다. 언니는 완전히 모범생 타입이었다. 공부 잘하고 말썽 안 부리고 질서 잘 지키고 어른스러웠다.

남동생은 약간 천재 과로,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반항기가 많고 고집이 셌다.


그 사이에서 나는 둘째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보다 공부는 못하고 동생보다 유니크하지는 않았으며 눈에 띄지 않는 착하고 애교 많은 아이였다.


아니 사실 나는 애교를 부리는 스타일은 아닌데, 워낙 언니와 동생이 무뚝뚝하다 보니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무의식 속의 행동이 애교로 나타난 것 같다. 그러니까 애교라는 건 어른들의 표현이고, 나는 어떤 상황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행동들을 해왔고, 어느새 그것이 내 역할로 굳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애교 많다고 하면 속으론 매우 듣기 싫었는데, 공부를 잘한다거나 천재라거나 하는 것과 애교가 많다고 하는 것 사이에서 표현의 위계를 느꼈으며 그 거리는 무척 멀어 보였다. 실은 착하지도, 애교가 많지도 않은데 그런 것 말고는 날 칭찬할 부분이 그렇게 없나, 하는 마음이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진짜 착하고 유한 사람이어서 그 점이 너무 맘에 들어서 좋아하고 칭찬한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최고의 칭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 앞뒤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어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어서, 아니, 내 위치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등등의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걸 그 사람의 장점 인양 칭찬한다면? 그러니까 회사에서 매번 식탁 위에 수저를 놔야 하거나 커피를 타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배려심이 많다고 칭찬을 한다면? 그건 칭찬이 아니라 칭찬의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살면서 무수하게 비교를 당했지만, 이렇듯 어릴 때부터 당해온 형제들 간의 비교와 거기에서 오는 열등감은 굉장히 오랜 기간 나를 지배해왔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한번 가출을 한 적이 있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재미없는 학교를 의미 없이 다니고 있던 어느 날, 문득 학교를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울에서 가장 먼 곳과 바다의 공통분모를 찾다가 '여수'로 목적지를 정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러나 가출의 전말은 빈약했다. 한밤중에 여수에 도착한 나는 해수욕장을 찾지 못하고 고기잡이 배가 드나드는 작은 선착장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바다에 쪼그리고 앉아 파도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무서워져서 근처 여관에 들어갔는데, 여관 주인아주머니가 학생인걸 알아차리고 내실에서 재워주었고, 다음날 아침밥을 같이 먹으면서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란 설득에 나는 그만 눈물을 흘려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집에 전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어머니를 보자 울어버린 나와 달리 눈물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그래, 너까지는 대학 안 가도 된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내가 성적 하락과 대학입시의 부담으로 가출을 한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었고 그 부담을 덜어주려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반대로 나에게 큰 상처로 다가왔다. 아, 어머니는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구나... 난 언니나 동생에 비해서 미약한 존재, 별것 아닌 존재, 열등한 존재가 맞는구나... 하는 확인을 다시금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의도와 달리 그 말은 나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그때까지의 삶을 지배한 둘째로서의 열등감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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