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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경 Aug 27. 2020

나혜석 같은 사람이 되거라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집안에는 책이 많이 쌓여있었지만 책 읽기보다는 만화와 티비 보는 것을 좋아했고, 노트건 벽이건 땅바닥이건 늘 어딘가에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곧잘 들었고 그래서 미술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그 시간만큼은 자신감이 넘쳐났고 언제나 칭찬을 들으니 행복했다.


국민학교 때의 어느 미술수업시간, 햇빛이 찬란한 화창한 봄날이었다. 날씨가 좋아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기로 했다. 그린 그림은 미술실로 가져가 미술 선생님께 검사를 받았다. 내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은 온화하고 밝은 웃음을 짓더니 "미경아, 너는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니 커서 나혜석 같은 사람이 되거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나혜석이 누군지 잘은 몰랐지만 그것은 칭찬이 확실했으므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그날의 찬란한 햇살과 미술 선생님의 온화한 미소 덕분에 ‘나혜석’이라는 이름 석자는 나에게 ‘꿈’이 되어버렸다.   


나혜석의 그림


그렇게 화가를 꿈꿨던 나는 그러나 미대 입시에 실패하고 끈기 없는 성격에 결국 창작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잘 그리는 사람’ 대신 ‘잘 보는 사람’으로 목표를 바꿨다.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평론 스터디 그룹과 연구회에 들어가서 큐레이터로 활동을 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여성 문화예술인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에서 전시 기획, 기획자 양성 등의 미술사업 실무를 맡아서 했으며, 2002년 여성의 역사를 다루는 전시관을 만드는 사업에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나의 꿈이었던 나혜석과 마주치게 되었다.


전시관에서는 고대부터 근대시대까지의 우리나라 여성의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 일단 상설전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성인물들을 다루는 것이 중심이었다. 그것이 가장 대중적이고 단시간에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취지인 ‘여성적 시각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단기간에 되는 일이 아니니 시간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다른 프로그램들을 연구하여 운영하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은 과거 시대 열악한 환경에서 용감하게 살았던 여성들,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 분야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했던 여성들을 최대한 드러내기로 했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와 자문위원, 정부의 입장 등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여성인물들 속에서 나혜석은 빠질 수 없는 존재임은 당연했다.  


나혜석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진보적인 소설과 에세이를 쓴 작가이고 유명한 결혼과 이혼, 연애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을 정도이고, 나혜석의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일본에서 유학했고 유럽여행도 했으며 프랑스에서 살기도 할 정도로 당시에 잘 나가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러나 진취적인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하던 그녀의 말년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말년은 병들고 외롭고 불행했으며 연고 없는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홀로 생을 마쳤다. 나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그녀뿐만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인 여성명사들이 비슷한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에 또다시 놀랐다.


그러니까 당대를 주름잡던 여성들의 말년은 외롭고 가난하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그 후세들한테조차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서간 만큼 사회적인 비난 또한 만만치 않아서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하기는커녕 숨기고 살아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


나혜석


그 사실을 알고 나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성들, 가부장제를 거부했던 여성들, 본인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켰던 그녀들을 시대가, 사회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으나,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았던 그녀들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국민학교 때의 미술 선생님이 그런 사실은 몰랐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그런 말을 칭찬으로 해주진 않았겠지. 사실 나도 나혜석의 말년이 그런 줄 그때야 알았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나는 나혜석처럼, 아니, 전시관에 있는 그 여성들처럼 살고 싶었다. 유명해지거나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고 싶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다는 의미에서. 물론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헤맬때 그녀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녀들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야근 후 300평 전시장의 불을 하나씩 끄고 깜깜한 그곳을 혼자 걸어 나올 때면 어디선가 그녀들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리곤 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듯.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이라고...


나도 나혜석처럼 말년에 외롭게 죽어갈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채 죽어갈까? 어느 나이까지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쿨하고 대범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더 먹다 보니 이제는 아니다. 그것은 매우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나는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해왔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외로운 운명이겠지만 주변의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버림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고 소통의 범위도 넓어졌으니, 세상의 선각자들이 역사 속의 그녀들보다는 덜 외롭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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