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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경 Aug 29. 2020

1980년 광화문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등교하여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큰 충격 속에 빠졌고 학교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슬픔’보다는 ‘놀람’의 눈물이었으리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어느 날 갑자기 총에 맞아 죽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80년 5월, 전국은 뒤숭숭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안국동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날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궁금한 나는 하굣길에 안국동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지 않고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대낮이었는데 광화문에는 모든 차가 끊겨있었고 시위대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시위대와 전투경찰이 대치하다가 밀고 당기고를 반복하면서 시민들도 우왕좌왕 뛰어다녔다.


그때 갑자기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다량의 최루탄이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서 도망가기 시작했고, 교복을 입은 나도 마구 뛰기 시작했다. 최루탄 때문에 코가 맵고 숨이 막혔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일단 경찰을 피해 들어가 숨을 곳을 찾았다. 건물들은 셔터를 내렸거나 내리고 있었고, 그중에 한 건물에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나는 처음 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는데, 그것은 죽음의 공포였다.


건물 안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눈물 콧물 범벅에 여기저기서 토하거나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와중에도 눈을 비비지 말라, 치약을 바르면 좀 낫다, 하면서 다독이고 어떤 이는 준비한 치약을 짜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거기서 한참을 숨어있다가 바깥이 잠잠해지고 버스가 다니기 시작해서야 나는 나올 수 있었다. 바깥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뉴스에서는 대학생들이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하고 있고 부상자와 연행자가 많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언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무릎이 까져서 피를 흘리며 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언니에게 시위에 참가하지 말라고 했다.


직선적인 성격의 언니는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언니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대학생들 많은 수가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고, 대의에 대해서는 대부분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던 터였으며, 대학생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한답시고 그런 소리를 하니까 언니는 화가 났던 것이다. 어머니는 너까지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었고, 언니는 어머니가 시위를 반대하는 입장이라서가 아니라 내 자식만은 안전하기를 바라는, 그런 식의 자식사랑 방식이 싫었던 것이다. 나는 언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언니가 잡혀가거나 다칠까 봐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그즈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주변에 경찰들이 상주하기 시작했다. 사복의 여자 경찰이 권총을 소지한 채 학교의 한 교실을 차지하고 있었고 학교 주변에는 항상 경찰차가 정차해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전두환의 딸이 다니고 있었는데, 나를 비롯해서 아이들은 사실 전두환이 누군지 잘 몰랐지만 경찰이 보호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게 되었다.


전두환의 딸은 평소에도 거의 전교 1등을 독점하는 아이였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똑똑하게 생긴 아이였다. 사실 그 아이보다 그 아이와 같이 다니는 친구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원래부터 학교에서 유명한 아이였다. 아직까지도 그 이름만은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 예쁜 아이는 나중에 결국 전두환의 며느리가 되었다고 먼 훗날 듣게 되었다.


1980년 여름, 전두환 정권은 7.30 교육 조치를 발표했는데,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하고 과외를 금지하는 조치였다. 대학은 학력고사 성적 50% 이상, 고교 내신 성적 20% 이상을 반영하여 학생들을 뽑아야 했고, 대학 정원을 대폭 늘리고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때 아이들 사이에서는 전두환의 딸이 대학입시를 위한 모든 과외를 끝냈다는 얘기가 돌았다.


본고사가 폐지되자 공부를 아주 잘했던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찌 보면 한시름 놓는 심정이었다. 이제 학력고사 성적과 내신성적으로 눈치작전을 펼치는 '입시 도박'의 시대가 된 것이었는데, 눈치작전에서 성공하면 미달인 학과에 거저 붙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80년대 초반의 '졸정제'세대와 '똥파리'세대들이 유례없이 다이나믹한 80년대 초반의 대학을 만들어 가게 되고, 나는 뒤숭숭하고 한편으론 역동적인 80년대 초반의 이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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