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미술과 음악 관련 학과가 없었다. 줄곧 화가를 꿈꾸어 왔지만 미대 입시에 실패한 나는 미술 서클에 기대를 하고 가입을 했다. 비록 미술대학은 못 갔지만 여기서 무언가 해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서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덥수룩한 머리에 수염을 깎지 않은 복학생과 마주쳤다. 퀴퀴하고 건조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뭔가 잘못 찾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다지 친절한 사람도 없었으며 늙수그레한 사람들끼리 미술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석고상이나 정물을 가져다 놓고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은 정말 잘들 그렸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가입을 했기에 열심히 나가려고 노력했던 어느 날, 나는 죠다쉬 청바지에 나이키 야구점퍼, 그리고 프로스펙스 신발을 신고 미술 서클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 들어가면 맘껏 멋을 부리고 다니리라 생각해왔다. 80년대에는 해외의 캐주얼 브랜드들이 국내에 진출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죠다쉬’라는 청바지가 유행이었다. 뒷주머니에 말이 수놓아져 있었다. 또한 스포츠 붐을 타고 나이키 등이 국내에 수입되고 국내 스포츠 브랜드도 활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유행이어서가 아니라 활동에도 편한데 멋도 있고 나한테 어울리기도 해서 그런 옷에 열광했다.
그런데 덥수룩한 머리의 복학생 선배가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너 그렇게 입고 다닐 거면 학교 오지 마라. 그런 옷은 학교 오지 않을 때 입어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모욕감에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성인이 입고 싶은 옷도 못 입나? 싶었지만, 당시 시대 분위기와 학교 분위기에선 그런 브랜드의 옷을 사 입는 것은 ‘의식이 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그런 브랜드들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비난받았다.
그 시절은 취향도 욕망도 검열당하는 시절이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 내가 먹고 싶은 음식, 내가 읽고 싶은 책,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모두 말이다. 그것이 또 다른 파쇼이고 폭력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느껴서도 안되고 입밖에 낼 수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브랜드 로고의 실밥을 튿어서 티나지 않게 입고 다녔다. 내게 중요한 것은 브랜드가 아니라 핏과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서클실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 옷들을 입고 야구장엘 갔다.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이라는 비난속에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나는 속으로 “오 신이시여 야구를 매일 볼 수 있다니 이것이 꿈입니까"를 외쳤다. 야구 또한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봐왔고 좋아했던 애정 템이지만 당시 분위기 때문에 야구장에 다닌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누군가에게 야구장에 가자는 얘기를 하기에도 눈치가 보였다. 어쩌다 한 번쯤 운동권과 상관없는 학과 동기들을 꼬셔서 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야구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혼자 야구장엘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비가 와서 야구가 취소되었는데, 혼자 비 오는 야구장 객석에 앉아비 오는 그라운드를 하염없이 바라본 적도 있었다. 가방에 몰래 넣어간 소주를 홀짝이면서 말이다. 제국주의 브랜드의 옷을 입고 우민정책인 프로야구를 보러 간 그날의 나는 너무나 외로웠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그렇게 80년대의 삐뚤어진 대학생이었던 내 심장에는 ‘금지된 욕망’과 ‘거부당한 취향’이라는 주홍글씨가 인두로 지진 듯 아프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