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절에 그런 영화를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1980년대 후반 역시 무척 뒤숭숭한 시기였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이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번져가고 있었으며,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운동의 기운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공부가 재미있다 하더라도 계속 상아탑 안에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학과 내에서도 교수들의 보수적인 시각을 답답해하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을 가기 전에 잠깐 참여했던 미술사 스터디 모임에서 연락이 왔다.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미술이론가들의 집단을 만들려고 하는데 참여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그룹에 주눅이 들어있었고 자신이 없었지만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참여하기로 했다. 해외 유학파 선배 몇 명과 주로 S대 출신의 젊은 미술 관련 전공자들이 20여 명 정도 모여 연구회를 만들었다.
방이 3개 딸린 사무실을 빌려서 공부도 하고 회의도 하고 토론도 하고 각종 모임을 했다. 연구회에서는 미술사, 미술제도 및 정책, 시각매체 및 대중문화, 미학 및 미술비평 등 몇 개의 전문분야를 나누어 연구를 했고, 나는 미술제도 및 정책 분야에서 민중미술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80년대 중반 미술계에서는 ‘민중미술’이라 불리는 새로운 미술운동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선배 세대들에게는 모더니즘을 탈피하고자 하는 운동이요, 후배 세대들에게는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여러 활동을 의미했다. 그러면서 이론과 평론 분야에서도 진보적인 시각으로 미술을 해석하고 정립하며, 민중미술운동을 지원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민중미술 작품들을 연구하고 평문을 통해 이론적으로 지원하며 작품론과 작가론을 쓰고 때로는 직접 현장에 나가서 돕는 일들을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기초도 충분하지 않은데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든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사무실에서는 연구를 하고 토론도 활발했지만 한편으로는 술판도 자주 벌어졌고 밤에는 삼삼오오 모여 "파업전야"같은 운동권 영화나 주제의식이 짙은 문제작들을 보기도 했다. 어느 날 밤, 그날은 나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워야 할 일이 있었고, 공부가 너무 팍팍하고 지루하여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다 보았다.
나는 당시 홍콩영화에 빠져있었는데 그날은 "영웅본색 2"를 빌려왔다. 장국영에 한참 빠져들어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한 선배가 쯧쯧 혀를 차면서 "넌 이런 시절에 그런 영화를 보니?" 하면서 알밤을 콩 때리고 갔다.
나는 그만 민망해져서 영화를 끄고 말았다. 매우 수치스러웠다. 대학시절 미술 서클의 선배에게서 들었던 말, "그런 옷을 입고 학교에 오지 말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아직 80년대였던 것이다. 그런 옷, 그런 영화는 아직 허락되지 않았던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한 80년대였던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머리로는 내가 잘못한 것으로 정리하고 그런 영화는 몰래 혼자 봐야 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홍콩영화나 나이키 점퍼나 외제 청바지를 좋아하는 감각은 버려야 하는 자본주의적 감각이었다. 검열하고 숨기고 억압해야 할 취향과 욕망들이 많은 나는 죄 많은 20대였다.
연구회에서는 탐구할만한 작가나 전문분야의 이론가를 정기적으로 초빙해 강연을 들었다. 작가를 초대할 때와 이론가를 초대할 때에는 각각 다른 재미가 있었다.
작가들의 인생사, 예술사, 예술론, 예술관, 그리고 못 본 작업들과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들을 때면 마치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을 들을 때처럼 흥미진진했다. 사실 젊은 평론가들로서는 어느 정도 자기의 작품세계가 있는 작가들에게 질문할 것은 별로 없었고 큰 토론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존중하는 태도로 경청하곤 했다.
사실 이론이나 평론을 하는 사람들은 창작을 백 퍼센트 이해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작가의 작품을 큰 맥락 안에서 맵핑해주고 창작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이 주요 업무라고 볼 수 있다. 시시콜콜 이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창작보다 시시한 일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런 일들을 제대로 수행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를 해야 하고 자신의 시각과 안목을 갈고닦아야 한다. 제대로 된 안목과 시각을 갖추는 일은 아마 창작의 고통에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론가나 평론가 초빙은 주로 우리가 접근하지 못했던 분야의 전문가로 이루어졌다. 북한 미술이라거나 동구권 미술, 만화나 건축,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나 연구자를 초빙했다. 우리가 모르는 분야의 지식을 배우는 것 역시 짜릿했다. 지식의 부족한 부분을 충족하고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중에 기억나는 한 강사가 있다. 미학자인 그는 사회주의 미술에 대한 강의를 준비해왔다. 시대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사회주의 미술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있었다. 강사는 북한, 러시아,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의 다양한 그림들을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그런데 그가 그림 안의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해 그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다가,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당위성이 없죠" 그러니까 거기에 꽃을 그릴 필요가 없는데 괜히 그렸다, 라는 말이었다.
사실 그 설명이 나는 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그림을 도식적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게까지 그림의 모든 요소에 당위성이 필요한 것일까, 꽃이 거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 꽃이 굳이 없어도 된다, 그건 누가 정하는 것일까. 있어서 문제 될 건 또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따라왔다. 너무 극단적이고 교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고 모두가 나처럼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강사는 특유의 말빨과 자신감 있는 태도로 강의를 일관했고, 모두가 만족해하며 강의를 마쳤지만 나는 그 이후로 그를 믿지 않게 되었다. 물론 사람은 변하고 발전하지만 그때 나를 큰 혼란에 빠트린 그 미학자의 방법론은 크게 변한 것 같진 않다. 나는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했던 생각이 그때도 지금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