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학교 안 다니면 안 돼?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 가길 싫어했다. 육아조합의 부모들이 공립학교조차 이것저것 따져서 골라 보낸 학교였는데, 불행하게도 초등학교의 첫 담임 선생님은 최악이었다. 나이가 많고 경력이 오래된 여선생님이었는데 전형적인 꼰대였다. 아직 아기 티를 못 벗은 그 어린애들이 처음 학교에 와서 긴장한 것도 안 보이는지 실수로 연필을 떨어뜨려도 혼내는 식이었다. 부모들이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또한 매우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예를 들 때 항상 4인 가족을 정상적인 예로 들었고, 당연히 형제가 있음을 전제로 했다. 당시 나는 이혼한 상태로 아이와 둘이 살고 있었는데, 아이는 선생의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가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에 상처를 받고 두려움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은 가족신문을 만들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는데, 선생이 수업시간에 혹시라도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 봐 나는 아이 아빠 사진을 같이 붙이고 거짓말로 가족신문을 만들어 보내곤 했다.
제일 괴로운 시간은 급식 당번이 되어서 현장에서 교사의 꼰대 짓을 고스란히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선생은 반찬을 가리는 애들을 혼낸다든지, 억지로 먹게 한다든지, 항상 아이들을 혼내고 창피를 주고 있었다.
나한테는 우리 아이가 너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며 아이를 위해 아이 아빠와 재결합을 하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는데, 정말 기가 차고 고소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한 번씩 학교에 갔다 오면 열불이 뻗쳐 밤에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렇게 최악의 선생을 첫 선생으로 만나서인지, 그동안 내가 아이를 과보호했는지, 아이 자체가 내성적이어서 그랬는지, 이후에는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아이는 학교를 너무 싫어하고 무서워했으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예 등교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억지로 끌고 학교 앞까지도 가봤지만 아이는 완강하게 저항했고, 몸무게가 불어난 아이를 교실까지 밀어 넣기에는 내 힘이 모자랐다.
그때 내가 두려워하지 않고 직장을 쉬더라도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아이를 토닥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두려움이 많았다. 나 혼자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할까 봐, 아이가 학교를 안 가면 큰일 날까 봐, 사회 부적응자가 될까 봐, 남들에게 욕을 먹을까 봐 두려웠다.
도저히 혼자서는 아이를 학교에 강제로 보낼 재간이 없어서 아이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시절 아이는 나에게 극심한 불신과 원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가 힘들었다. 멀리 있는 아빠에게 잠시 보내기로 했다. 아이는 아빠에게 가서 그 지역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이는 중학교를 가기 위해 다시 나에게 왔다.
중학교 입학식 날은 추운 초봄이었다. 학교 강당에 아이들을 세워두고 선생들은 아이들이 제대로 줄을 안 선다고 혼내고 소리치고 있었다. 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교장의 훈시 내용도 똑같았고 아이들의 표정도 똑같았다. 학교는 마치 군대 같았다. 강당에서의 입학식을 마치고 아이들은 각각의 학급으로 돌아갔고 복도에는 학부모들이 서있었다. 담임은 아이들에게 뭐 뭐하면 혼난다, 뭐 뭐하면 안 된다, 뭐 뭐하면 무슨 벌을 받는다... 이런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고 아이들을 겁주고 협박하고 있었다. 부모들이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날 직감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지 않을 것임을.
입학식 이후 이틀 지나서 담임에게 전화가 왔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학교를 간답시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 아이를 미행했다. 아이는 학교로 가지 않고 동네 놀이터로 갔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어디론가 향했다. 우리 집은 당시 한강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는데, 아이는 터덜터덜 한강으로 가서 반나절을 한강 벤치에 앉아있다가 내가 출근을 했을 안정적인 오후 시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너무나 가슴 아픈 장면이다. 그때 아이는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선생이, 학교가 얼마나 무섭고 그걸 알아주지 않는 엄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결국 나는 아이에게 지고 말았다. 학교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갈 수가 없었다. 어떤 협박과 회유에도 아이는 학교를 거부했다. 그날부터 아이는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 있게 되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출근을 해야 했고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는 오로지 혼자 집에 있었다. 아이는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했고 배달음식을 시켜먹었다. 아이는 점점 살이 쪘고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아이가 걱정이 된 나는 대안학교를 알아보았다. 몇 개 안되었지만 대안학교 중 제일 유명한 곳에 지원서를 넣었다. 경쟁률이 센 곳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부모의 이력과 성향을 중요시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지원서에는 주관식으로 된 부모 설문지도 있었는데 그중 “친환경 제품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고, 나는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모든 제품을 친환경 제품으로 쓸 수는 없을 것 같다”라는 뉘앙스의 답을 적었다. 그 대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의 미술운동 이력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학교에서는 퇴짜를 맞았다.
이후 지인으로부터 강화도에 기숙 대안학교가 있는데 입학이 크게 까다롭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를 데리고 강화도로 갔다. 아이는 너무나 가기 싫어했지만 엄마가 힘들어 보였는지 억지로 따라왔다.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오래 했던, 존경받는 지역명사가 교장으로 있었고 교사들도 대부분 운동권 출신이었다. 강화도의 폐교를 학교로 쓰고 있었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했고 아이들은 축구를 하거나 탁구를 치고 있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학교의 아이들은 우리 아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이들은 밝고 활달해 보였다. 교장선생님이나 교사들은 오래 운동을 한 사람 특유의 여유롭고 인자한 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떼를 쓰고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나는 일주일만 있어보라고 설득하며 억지로 아이를 떼어놓고 왔다. 떼어 놓고 오면서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서 나는 많이 울었다.
아이는 그 학교를 2년 정도 다녔다. 방학 때마다 집에 왔다가 개학 때 다시 돌아가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가기 싫어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아이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학교도 역시 육아조합처럼 부모의 참여를 당연시했고, 부모가 주기적으로 학교에 가야 했다. 학교에 가면 마당에 둘러앉아 차나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학교 운영에 관한 얘기를 했다. 여기도 제일 큰 고민은 역시 돈이었다. 지원을 받으려면 중등과정에서 시켜야 하는 과목 몇 개는 꼭 집어넣어야 했다. 부모들의 돈 만으로는 운영이 되질 않았다.
아이들은 몇 개의 생활관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생활관이라고 해봤자 그저 허름한 시골집이었다. 부모들은 돌아가면서 생활관에서 며칠 체험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잘 나지 않았지만 나도 한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가보니 생활관은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었고 특히 부엌은 엉망이었다. 식사는 학교 내에서 전문가 선생님이 좋은 재료로 만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였지만 생활관은 각각 따로 관리할 선생님을 둘 만큼의 여유는 되지 않았었다. 친환경적이지는 않지만 부엌 싱크대에 눌어붙은 것들을 닦고 벌레들을 퇴치하기 위해서 나는 강한 화학약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의 방학과 개학 때마다 아이를 데리러 강화도에 가서 짐을 가지고 같이 와야 하는데, 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던 내게는 큰 곤욕이었다. 시골생활을 하려면 차가 필수라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차가 없는 나는 버스를 타고 와서 시골의 논두렁 길을 한참 걸어가야 학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돌아갈 때 역시 아이와 함께 이불이며 옷가지며 책이며 엄청난 짐을 이고 지고 다시 버스 정류장까지 논두렁 길을 걸어가야 했다. 방학은 여름과 겨울이므로 덥거나 추웠고 진짜 힘들었다. 그러나 다른 부모들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손만 흔들며 인사를 하고는 슝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너무 야속하고 서운했다. 물론 차 안에 우리를 태울만한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구겨 넣으면 얼마든지 들어갈만하게 느껴졌던 건 우리가 진 짐이 너무 무거워서였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이고 지고 아이랑 같이 걷던 그 뙤약볕의 논두렁 길이, 찬 바람에 볼과 손이 터질것 같았던,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그 논두렁 길이 무척 외로웠다. 내가 공동체를 믿지 않게 된 뚜렷한 순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역시 여기도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모이면 영락없이 아빠들은 주는 밥 얻어먹으면서 토론, 엄마들은 애들 돌보며 음식 차리기의 패턴이 반복되었다. 하룻밤 자고 가야 하는 부모모임에서도, 아빠들은 아이들 없이 자기들끼리 밤을 지내고, 엄마들은 아이를 몰아넣은 생활관에서 애들을 돌봐야 했다. 그런 방 배정에 내가 반발한 적도 있었다. 아이는 그런 엄마가 약간 창피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화가 났고 참을 수가 없었다. 항상 이런 식이구나, 변하는 게 없구나, 라는 생각에 좌절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해결하지 못하는 학교의 교육 방식이었다. 내성적이고 유약한 우리 아이는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 놀림을 자주 받고 물건을 자주 뺏겼다.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주말에 강화 시내에 나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삥을 뜯거나 삥뜯기를 시키기도 했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시달리던 아이는 선생님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학교 운영에 바빠 아이들을 섬세하게 관찰하거나 돌보지를 못했다. 그 점을 악용하는 아이들은 계속 나쁜 짓을 저질렀다. 선생님들 자체는 다들 인성이 좋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는데, 이러한 성품 때문에 혼을 내도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생들은 아이들끼리 해결하라고 했고, 그것을 좋은 문제 해결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아이들이 승리하고 약한 아이들은 그냥 당하고 사는 것이 반복되었다. 어른들이 어디에 개입하고 어디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지 선생들은 몰랐다. 벌을 준다는 것이 기껏해야 명상하게 하고 지리산 같은데 데려가서 폭포수에 몸을 담그게 하는 정도였는데 무서운 분위기는 당연히 아니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당하는 아이들은 계속 당했다. 그것의 가장 큰 부작용은, 당한 아이들은 세상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선생을, 어른을 불신하게 된다는 점이다.
아이는 이러한 10대 또래 남자아이들의 폭력성을 싫어하고 그들과 어울리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여자애들하고 친하게 지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놀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만의 연대가 강해서 남자애가 낄 틈이 없었다.
내가 학교에 갔을 때 봤던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 중 하나는, 아이가 몰래 운동장의 나무 밑에 피어있는 식물에 물을 주러 왔다 갔다 하는 장면이었다. 왜 몰래 물을 줘야 했는지 말이다. 아마 아이가 물을 주는 걸 알았다면 남자애들은 그 식물을 짓밟았겠지. 그리고 아이가 상처 받는 걸 보고 놀려댔겠지. 운동도 잘 못하고 축구도 싫어하고 남자아이들과 같이 어울려 놀기가 쉽지 않아서 식물에 몰래 물을 주는 걸로 시간을 때우던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은 갈갈이 찢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남자애지만 머리가 길었고 살결이 하얗고 물살이 올라서 포동포동하여 약간 여자애 같이 보였는데, 남자아이들이 자기 여자 친구라고 놀려서 많이 괴로워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아이는 죽기보다 싫은 표정으로 시무룩해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집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선생들한테 일말의 기대를 하면서, 아이가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억지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이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아이가 울며 "엄마 나 그냥 집에 가면 안 돼?"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그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목소리는 엄마를 위해 참아왔던 그간의 모든 아픔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고, 다음 날 바로 나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선생들은 아이가 그 학교 최고의 신사이며 별 말 없어서 적응을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화는 내지 않았다. 선생들도 바쁘다 보니까 그랬겠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 얘기하지는 않았다.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느꼈다. 선생들이 변할 것 같지도 않고 변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아직 주체들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학교 문을 열었다고 봐야겠다. 선생들도 부모들도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저 운동의 연장으로, 기존 교육에 대한 반대와 거부감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것이 한국사회의 장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실험에서 피해 보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그것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일차적으로 어른들이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 과정에 대해 정당화하고 결과에 대해 자화자찬을 한다면 거기서 바로 어긋나는 것이다. 아이들은 더 이상 그런 어른들을, 그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서울에 있는 또 다른 대안학교에 아이를 보내봤지만 아이는 하루 가고 펑크를 냈다. 아이는 분위기가 싫다고 했다.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어른들에게 잘 보이는 법을 너무 잘 아는 아이들, 그런 분위기가 싫다고 했다. 결국 아이는 모든 학교를 그만두고 10대의 중후반을 집에서 보냈다.
사실 아이가 학교를 안 갔던 모든 것에는 이유가 다 있었다. 나는 속으로는 그 이유를 다 이해했지만, 돈을 벌러 다녀야 했으므로 아이를 다독이며 설득할 여유가 없었다. 설득할 이유도 사실 마땅치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 나라면? 나도 학교를 안 갔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태도라면 그래도 보내야 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그때 아이에게 학교는 안 가도 된다고 조금 더 긍정적으로 말하고 웃으면서 아이를 품어주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두려웠다. 아이가 잘못될까 봐, 아이가 삐뜰어질까 봐, 남과 다르게 사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아이에게 너만 왜 유별나게 구냐, 다른 아이들은 바보라서 다니는 줄 아냐 라며 화를 내고, 너 그러다가 잘못된다, 사회에 적응 못한다 라고 협박도 하고 그랬었다. 그게 가장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고 후회가 된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부모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이다. 아이가 그 나잇대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넘어갔을 때 잘못되고, 무엇이 부족했을 때 어떤 문제점이 있고, 이런 언술과 이론들이 부모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부모가 처음이고 혼자 아이를 키워야 했던 나는 헷갈리고 불안하고 두렵고 외로웠다.
아이는 집에서 혼자 있으면서 컴퓨터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게임도 하고 포토샵으로 그림도 그리고 인터넷으로 친구도 사귀면서 그렇게 컴퓨터와 마주하고 10대와 20대를 보냈다. 내가 바쁘기도 하고 아이도 과묵한 스타일이라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아이는 무척 외로웠으리라. 그 시기에 나는 바쁘기만 하고 돈이 벌리지 않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느라 아이에게 좋은 음식을 해주지도 못했고 살갑게 마주 앉아 대화를 하거나 얘기를 들어주지도 못했다. 어쩌다 저녁시간에 같이 배드민턴을 치거나 한강을 산책하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시간은 별로 없어도 대화라도 다정하게 해 줄걸, 뼈아프게 후회한다. 아이가 얼마나 소외감 느끼고 외롭고 불안했을지...
그런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어야 했는데, 나는 일하는 것도 사는 것도 너무 벅차고 힘에 겨웠었다. 내 삶이 전반적으로 불안하고 힘들었던 시기이고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던 시기라 아이에게 신경을 써주질 못했다. 아이는 그 시절을 인터넷을 하면서 버티었다. 우리 둘 다에게 너무도 힘든 시기였다.
지금 아이는 많이 커서 어느덧 20대 후반이 되었고, 군대도 별 탈 없이 육군 현역으로 만기 제대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컴퓨터를 많이 해서 거기서 얻은 지식과 기술로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고 본인의 꿈도 디지털에서 찾아서 개척해 나가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해준 것도 없고 알려준 것도 없지만, 스스로 찾아서 해내고 있다. 인터넷에서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미래를 꿈꾼다. 나는 이제 걱정하지 않고 두렵지 않다. 아이는 삐뚤어지지도 않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아니며 성격이상자나 파탄자가 된 것도 아니다.
물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고 결핍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아이는 그 결핍에 공감하는 아이들과 소통하고 그 나잇대에 하는 고민들을 똑같이 하고 있다. 큰 반전이 있는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다. 나는 이제라도 아이를 믿어주고 불안하지 않게 해 주며 항상 긍정적으로 격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아이의 인생은 아직 창창하다. 앞으로 지금 살아온 것의 두배, 세배는 더 살아야 한다. 나는 두려워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아이의 인생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려 한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네가 옳았고 앞으로도 옳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