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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경 Oct 22. 2020

그 노래를 놓아줘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90년대 후반, 육아조합의 아이들은 점점 커서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나는 당연히 그 동네의 공립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부모들이 사립학교 얘기를 꺼냈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립 초등학교는 거리도 있는 데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런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육아조합을 시작한 이유와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동네에서 같이 아이를 키우고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여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운동 아니었나.


사립학교 이야기를 꺼낸 부모들이 처음부터 목표가 달랐는지, 아니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중간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이슈에 대해 나와 같은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에 2차 충격이 몰려왔다. 이들이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그저 내 아이를 안전하고 특별하게 키우고 싶었던 것이었나. 소위 EQ를 길러주고 싶었던 것이었나. 특별한 경쟁력을 가지길 원했던 것일까. 그러려고 이것을 만들었나.


막스가 그랬던가. 사유재산 제도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그러니까 자기 새끼를 가진 인간은 얼마든지 영혼을 팔 수가 있고, 자기 새끼를 위해서는 소신 따위는 언제든 내팽개칠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을 가진 인간들을 내가 너무 쉽게 본 것이다.
(물론 나의 부모도 학구열이 높아 가정형편에 맞지 않게 나를 비싼 사립 국민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나의 부모는 대의를 외친 적도 없고 조직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실 부모의 의도와는 달리 사립 국민학교를 다닌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서 그런 학교를 다닌 것은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보았다.)


그런데 사립학교에 보내겠다는 몇몇 부모에게 다른 부모들은 관대했다. 어찌 보면 다들 맘속으로는 사립학교에 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고 혹은 어쨌든 대의명분을 앞세웠기 때문에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을는지도. 여하튼 그렇게 심각하게들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선택이라는 명목 하에 존중해주는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개인의 선택, 개인의 자유를 존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사건으로 나는 86세대의 허상을 결정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같은 줄 알았는데 결코 같지 않은 ‘너무 다른 우리’들이 선명하게 체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서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집 빼고는 조합의 모든 가정들이 잘 살고 있었다.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은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맞벌이 부부도 많았다. 월세를 사는 사람은 우리 집 외에 몇몇 집 밖에 없을 정도였고, 다들 그 비싼 서울 한복판에서 전세나 자가주택에 살고 있었으며 차도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그게 사실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대학 때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사람들이 어떻게 번듯한 직업들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 대책 없이 살았던 것이고, 그들은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인맥이나 학맥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맥, 학맥 따위 애초에 내팽개친 데다가,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경제관념 하나도 없고 경제적인 대책을 세울 생각을 하지 않은 내가 한심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그렇게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나는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지를 한 사람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입으로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말을 외치면서 자기 자식을 일반인은 보낼 수 없는 조건의 학교에 보낸다든지, 비싼 유학을 보낸다든지, 거액의 상속을 해준다든지 등을 하는 인간이라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믿지 않게 되었다.


자식을 위한 부모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면 자식을 어떻게 키울지 감히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살 것이다. 머릿속의 소신을 자식 때문에 지키지 않는,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자식을 위해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상처는 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결정적으로 86 운동권 세대에게 실망하게 된 사건은 사립학교 이슈이지만, 육아조합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계속 상처를 받고 큰 회의감에 시달렸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당연히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육아조합운동은 먹거리 운동과 연결되었다. 어느덧 그 동네에 생협이 만들어졌고 거기서 유기농, 국내산, 친환경 먹거리 제품들을 판매했다. 그러다가 다들 밖에서 일하기 바쁘고 집에서 요리를 할 시간이 없자 반찬가게를 만들었다. 좋은 재료로 건강하게 만든 반찬가게였기에 가격은 좀 비쌌지만 재료와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격이었다.


그런데 나는 퇴근하면서 이 반찬들을 사서 집에 와서 밥을 해서 먹이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밥도 같이 팔거나 아니면 아예 식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혼자 가서도 안전하게 먹을 수 있고 외롭지 않을 동네 식당 말이다. 그래서 반찬가게를 만들면서 식당도 같이 만들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한 엄마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밥은 집에서 해 먹으세요"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니까 밥까지 안 하려고 하냐는 질책이 섞여있었다. 아니면 저녁밥은 가족끼리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거나.


그런데 육아조합의 정신이 무엇인가. 마을이, 공동체가 공동으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부모가 바쁘거나 사정이 있을 때, 마을의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밥은 꼭 집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밥은 집에서 가족끼리 먹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인가. 그것이 가족애를 증명하는 것인가. 아이가 동네 사람들 틈에서 밥 먹는 것이 그렇게 불쌍한 일인가. 그런 아이들이,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마을 사람들이 니 아이 내 아이 할 것 없이 어색함 없이 돌봐가면서 친근하게 같이 밥을 먹는 것, 그것이 원래 이 운동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 아닌가.


나는 때로 동네의 저렴한 '김밥천국'에서 대안을 찾았다. 그곳에는 동네의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밥을 먹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층과 다양한 사람들이 오갔고 혼자 와서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었다. 재료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나에게는 그만큼 안전하고 포근한 동네 밥집이 없었다. 저녁이 늦어져서, 밥할 시간이 없어서, 반찬이 없어서, 다양한 이유로 찾아가도 그런 나를 탓하지 않는 동네 밥집. 내게는 그런 밥집이 필요했다. 대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에게서 "밥은 집에서 해 먹으라"는 말을 듣거나 그런 생각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좌절하고 상처받았다.


또한 육아조합 개별 가정의 경우, 여전히 가족 내 성역할은 고정되어 있고 육아는 대부분 엄마들의 몫이었다. 엄마들은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도 돌봐야 했다. 몇 년 동안 육아조합이 주최가 되어 개최한 마을축제 때 본 광경은 전통적 가부장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빠들은 축구를 하고 엄마들은 아이를 돌보면서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 아빠들은 축구 끝나고 평상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조직이니 정치니 토론하며 웃고 떠들 때 엄마들은 아이를 돌보며 그들의 식사 거리와 안주거리를 만드는 모습, 아빠들이 술 취해서 운동가요를 부를 때 엄마들은 설거지를 하며 뒷정리를 하고 있는 모습, 너무나 익숙하고 많이 본 그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이런 모습인데, 아이들 앉혀놓고 따로 성평등 교육시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결국은 이래서 아이들이 어른을 못 믿게 되는 것 아닐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게 되고 그들의 위선에 치를 떨게 되는 것 아닐까. 젊은 이들이 '위선'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 스스로 그렇게 잘나고 옳다고 부르짖는 어른들의 옳지 못한 행동들을 보았는데, 어떤 말이 설득력을 가질까.

 

마을축제가 끝나고 부모들이 술에 취해 어울렁 더울렁 어깨를 걸고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 모습이 나는 제일 싫었다. 뜨거운 광장에서 목놓아 부르던 그 노래의 의미와 맥락은 이제 그대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노래를 이젠 그만 놓아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들과 어깨를 걸고 함께 가고 싶은 세계가 내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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