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미경 Oct 06. 2020

쉽지 않은 실험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4년여를 전업주부로 지냈다. 다행히도 모유가 잘 나와서 2년간 모유수유로 아이를 키웠고 그 덕에 아이는 나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이가 조금 크자 어린이집을 보낼까 생각했다. 나도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아이에게도 사회성을 길러주어야 할 것 같았다.


동네에 있는 어린이집을 가보았다. 간식시간이었는데 초코파이를 주었고 선생님은 과자 부스러기를 흘린다고 아이들을 혼내고 있었다. 그런 곳에 아이를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몇 군데 돌아본 어린이집 사정은 비슷했다. 도저히 그런 곳에 아이를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댁이나 친정에서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 누군가 육아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당시 386세대들이 말하자면 육아운동, 교육운동, 지역운동의 차원에서 만든 것이라 했다. 마을에서 아이를 공동으로 키운다는 의미에서 공동육아라고 했다. 이미 1차로 서울의 한 동네에 조합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었고 2차로 만들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나는 신청을 하고 모임에 나갔다. 조합을 만들어서 출자금을 내고 그 돈으로 공간을 구하고 선생님들을 고용하여 아이들을 같이 키운다는 것이 기본 골자였다.


교사, 부모, 아이 이렇게 3자가 조합의 주체라고 했다. 오랫동안 빈민 탁아 운동을 해 온 믿음직한 선생님이 계시기도 했고,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서 아이를 같이 키우자고 하는데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런데 목돈이 들어가는 출자금은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니 어디서든 빌리면 되겠지만, 문제는 매달의 보육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 약간 망설여지기는 했으나, 더 이상 다른 선택은 없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내가 그 시간에 일을 해서라도 보육비를 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을 같이 키울 공간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가격에 맞게, 그것도 임대로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조금씩 더 무리를 하고 운도 따라줘서 어렵게나마 시작을 하게 되었다. 약 30여 명의 가구가 모여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아이들은 영아부터 6세 정도까지였고 선생님은 4~5명 정도 되었으며 식사를 책임지는 선생님이 따로 있었다. 음식은 생협이나 한살림의 유기농 제품들을 원칙으로 했다. 인스턴트는 먹이지 않았고 간식도 감자, 고구마, 옥수수, 빵, 떡, 달걀 등이었다. 아이들이 좋은 음식 먹고 마당에서 뛰어놀며 좋은 선생님 밑에서, 좋은 이웃들과 함께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으리라. 돈이 많이 들더라도 그렇게 키우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나는 비록 반지하 월세방에 살고 있었지만 아이를 이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과 부모들과의 관계도 남달랐다. 선생님들을 선생으로 보기보다는 이웃으로 보고 서로 집에 초대도 하고 스스럼없이 지냈다. 부모와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별명을 부르고 반말을 하며 동네 누나, 동네 언니로 여기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 관계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을 궁금해하고 신경 쓰고 사랑해 주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당시 나는 비싼 것 빼고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어린이집이라고 생각했고 안심했다.

그러나 어린이집 운영은 운동조직의 운영과 같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조직을 짠다고 해서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와 교사로 이루어진 회의 체계에서는 항상 부모의 목소리가 높았다. 아무리 평등한 관계라 하더라도 부모는 다수이고 돈을 내는 사람들이고 교사는 돈을 받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를 돌보는 일에 부모가 전문가는 아니다. 부모들은 운영을, 교사들은 교육을 맡아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서로 존중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부모들이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자식 문제가 걸리면 이성을 잃는 게 부모들이다. 또한 현장을 모르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어느 현장에서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본인도 본인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 물론 전문가이지만 남의 아이들을 여러 명 돌보는 것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님을 부모들은 자꾸 잊어버렸다. 믿고 뽑은 선생님들이라면 끝까지 믿어줘야지, 시시콜콜 따지게 되면 교사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어떤 일보다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육교사들에 대한 처우가 심각할 정도로 열악하다. 일의 강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수는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있으며 전문가 대우도 받지 못한다. 물론 육아 조합의 경우에는 미래의 대의를 위해서 지금의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어느 정도 깔고 가는 것이기는 한데, 교사들의 희생에 비해 부모들의 희생은 미약하게 느껴졌다. 어떨 때에는 부모와 교사 간의 기싸움 양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사회도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했는데 부모들도 돈 버느라고 바빠 다들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럴 바엔 그냥 부모가 빠지고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운영을 하게 해야 했다. 교사들은 언제나 을의 위치에서 강한 발언을 하지 못했고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돈이라는 것이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만드나 싶기도 했다. 결국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라니... 부모와 교사의 관계가 참으로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사들이 보다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펴기를 원했다. 내가 볼 때 부모가 개입해서 뭔가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회의는 소모적이었고 서로의 에너지를 축내고 상처만 깊어지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부모는 운영만, 교육은 교사에게. 이렇게 나누어서 했어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부모들에 대한 비판이다. 나도 부모라는 비이성적인 존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모들의 적극적 개입은 386 세대의 관성이었다고 본다. 무엇이건 내가 더 잘 알고 내가 제일 잘났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마인드. 나를 거쳐가야만 하고 나를 설득시켜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마인드. 80년대 운동을 거치면서 갖게 된 계몽적 마인드와 오지랖. 그것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싼 서울 한복판에서 매번 전세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매물이 있어도 어린이집을 한다고 하면 거부하는 주인들도 많았다. 이래저래 운영은 계속 어려웠고 이렇게 계속 운영될 수 있을까 항상 불안했다. 이 운동이 지속되려면 안정적인 공간 마련이 최우선인데, 각자 자기 집들은 있지만 공동의 공간을 구입할만한 의지와 여건이 안된다는 생각에 한계가 느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