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가 안 되는 사람들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새로운 현상이 생기면 그 현상을 가리킬 언어가 필요하다. 새로운 내용은 새로운 형식에 담기는 법. 90년대 미술계에 이른바 '대안 ALTERNATIVE'라는 말이 생겨났다. ‘큐레이터 CURATOR’라는 명칭도 생겼다.
'대안공간'은 기존의 공공미술관이나 사립미술관이 하지 않는 다양한 실험을 하는 공간이었다. 80년대 민중미술을 위한 전시장 '그림마당 민'이 있었던 것처럼, 그러한 실험적인 공간들이 90년대에 이곳저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 진보적인 성향의 미술인들이 출자해서 만든 한 대안공간이 생겼고 나는 거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출자금을 출자하고 방향성을 대표하는 선배 격인 운영위원들이 있고, 공간 운영의 실무를 총괄하고 방향성을 지켜나가는 실장이 있고, 나를 비롯한 한 두 명이 실무 진행을 맡았다.
‘큐레이터'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도 그즈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분야도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이제는 큐레이터뿐만 아니라 역할에 따라 디렉터, 갤러리스트, 모더레이터, 코디네이터, 딜러, 크리틱 등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대안공간은 물론 그간 오랫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활동을 지속해 온 미술계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만, 정부와 언론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의욕 넘치고 뜻이 있는 공무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대안공간이 정부의 지원을 받고 활발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 공무원의 역할이 컸다. 그는 대안공간의 필요성과 지원의 필요성을 윗선에 제안하고 설득하여 뜻을 관철시켰다. 또한 언론사의 기자들도 중요 지면에 대안공간에 대한 홍보와 진보적 평론가들의 글을 꽤 할애하였다.
내가 일하던 대안공간은 몇몇의 대안공간 중에서도 비교적 많은 미술인들이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이론과 창작을 병행해 나가는 활발한 공간이었다. 기존에 활발히 활동을 하던 작가들,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 예술가들 등, 모두 작업의 방향이 공간과 맞으면 전시를 할 수 있었다.
전시는 크게 두 종류로, 공간 측에서 기획을 해서 작가를 초대하는 기획전시와 작가가 비용을 지불하고 공간을 빌리는 대관전시로 나뉘었다. 비용을 지불하고 공간을 빌리더라도 심사를 해서 공간의 성격과 맞아야 했다. 공간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니까.
또한 여러 가지 스터디나 세미나, 강연을 기획, 개최하기도 했고 다양한 행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런저런 자체 사업들과 정부 지원금과 민간인들의 후원금으로 공간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운영은 빠듯했다. 정부지원금은 사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재정이었고 금액도 적었다. 공간이 지속되려면 자체사업과 후원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자체 사업이라고 해봤자 전시 대관과 기금 마련 전시 정도였다. 전시대관비는 공간의 성격상 다른 전시공간에 비해 저렴할 수밖에 없었다. 기금 마련 전시는 일 년에 한 번씩 열긴 했지만, 본격적인 판매를 위한 아트페어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주로 지인들이 구매를 해준다거나 지인의 측근들을 통해 판매를 하는 정도의 작은 행사였다. 평소에 전시장에서 작품이 판매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미술작품을 사거나 후원금을 내줄 후원자를 모집하고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문적인 영역이다. 후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후원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상시적으로 가동이 되어야 하고, 작품을 사 줄 후원자들에게는 그 작품을 왜 사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평상시에 늘 설득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무엇보다 작품을 파는 사람의 인지도나 신뢰도가 중요하다. 대학교수면 가장 좋고, 기자나 유명 전시장 주인, 유명한 평론가 등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있거나 권력을 잡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모름지기 작품을 사거나 후원금을 내줄 후원자를 모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주기적으로 같이 ‘노는’ 것이다. 작품을 팔 때만 만나서 열심히 작품 설명을 한다면 "아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단순히 돈주머니로 보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한두 번은 도와줄 수 있겠지만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후원자들을 위한 행사나 파티도 자주 열어주고 미술계 돌아가는 얘기나 미술 관련해서 영양가 있는 얘기, 재미있는 에피소드, 몰랐던 지식 등을 수시로 알려주고 작가들과도 만나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나도 수준 있는 미술애호가이고 미술이나 예술에 대해 남들보다 많이 알고, 미술계 사람들하고도 친하다는, 어떤 문화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본인들이 후원을 하는 행위가 단순히 경제적인 투자나 소비에 머물지 않고, 문화계에 이바지하고 문화발전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사기를 치거나 속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접근하고 설득하고 노력해야만, 당장의 눈앞의 이익만을 좇지 않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진정한 문화예술계의 후원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서로의 문화가 어느 정도는 비슷해야 한다. 외모부터 입는 옷, 음식, 술, 관심사까지 말이다. 그런 것을 후원자들에게 어느 정도는 맞춰줘야 하고 맞춰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겉으로 너무 차이가 나 보이면 안 된다. 그러면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 후원자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술가들이나 예술계 종사자들은 경제적인 풍요로움보다는 문화적인 소양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돈이 많다고 누군가를 인정하거나 존경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평소엔 숨기고 있다가도 어떤 계기를 통해(주로 술을 마시다 보면) 숨겨왔던 본심을 드러내고 후원자들을 은근히 무시하거나 돌려까거나 편을 나누는 얘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한 번이라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후원자들은 상처를 입고 마음을 돌린다.
불행히도 당시 내 주변의 얼터너티브 하다는 사람들은 대개 뼛속 깊이 까칠하고 타협이 되지 않아서 문제였다. 낯가림이 심한 체질들이었다. 그런데 체질을 바꾸는게 힘들다면 후원자를 모으는 행위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포섭하고 설득하는 것이 힘들다면, 그냥 실력만 가지고, 올바른 방향과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현대사회에서 너무 순진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는 그랬다. 그 누구도 비즈니스를 잘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우리끼리 소주나 마시고 노래방이나 가고 가끔 홍대 클럽이나 가는 것. 그리고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면서 토론하고 싸우는 것 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가난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다 운영위원이 후원자가 될만한 사람을 데려와서 뒤풀이나 술자리에 동행하게 되는 경우에도, 그 누구도 그분에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응대 이상은 하지 못하고, 결국 어느새 그 손님은 따돌림을 당하고 술값이나 계산하는 상황이 돼버리곤 했다.
아아 정말이지 (나를 포함해) 비즈니스를 너무나도 못하는 사람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 누구도 하지 못했고, 나는 그렇다 치고 (나보다 좋은 조건과 환경을 갖춘) 너희들은 왜 못하냐는 생각도 많이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바뀌어야 하는 건 아는데 바뀌지가 않는걸, 죽어도 바뀌지가 않는걸 너희들도 어쩌겠냐 싶었다. 그저 가난이 운명인가 하노라, 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