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미경 Jan 16. 2021

파티를 여는 여자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공간을 중심으로 인맥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공간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나는 중심에 있다기보다는 주변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아마도 미술계에서 일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일류대학을 나온 쟁쟁하고 날카로운 이론가들과 평론가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학파 이론가들과 세련된 해외파 작가들, 그리고 (나는 포기한) 미술대학을 나와서 고유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멋진 미술가들… 이들 틈에서 나는 어떤 권위도 권력도 없었다. 외국어도 못했고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고 멋진 평론문을 쓰지도 못했고 큰 인맥도 없었다.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나는 전문가로 느껴지기보다는 큰 언니, 큰 누나로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나이도 많은, 배려심 많고 이해심 많고 항상 웃어주는, 그 세계에서 그나마 까다롭지 않은 언니이자 누나. 그게 나의 포지션이었다.


나 스스로는 고유한 시각과 언어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공부가 부족했다. 당시 트렌드인 외국의 저명한 이론가들의 책을 읽지 않아서 전문용어도 잘 몰랐다. 그런데 평론을 쓰거나 작가를 대할 때, 시사분석이나 작품평을 할 때, 전문용어를 많이 아는 것은 큰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전문용어라는 것은 구구절절 써야 할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새로운 내용은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하니까 말이다.


나는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 아니, ‘맛’이 있는 작품과 ‘맛’이 없는 작품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그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글이나 말로 설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전문가가 필요한 것인데, 나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공부가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저 감각과 취향만으로 살아지기를 원했고 그것으로 충분한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큐레이터를 하면서 내내 괴로웠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님을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이 좋았고 그림으로 칭찬받아왔고 미술사 공부까지는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쪽에서 일을 하는 것도 잘 맞을 것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그러나 큐레이터나 평론이나 기획 같은 일들은 미술을 좋아하고 감각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눈이 좋다고 해서 좋은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리고 당시 사회 모든 분야에 불어닥친 글로벌화의 진행은 무서울 정도였는데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 작가들의 해외진출과 외국작가들의 국내 전시는 물론, 많은 전시가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의 콜라버레이션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면서 큐레이터의 영어능력은 필수요건이 되었고, 영어를 못하는 큐레이터는 주류에서 일하기 힘든 구조가 되어버렸다.  


아, 왜 영어공부는 죽어도 하기 싫을까… 특별히 모국어를 사랑해서는 아니었다. 역시 천성이 게으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나는 낙후되고 도태될 운명이었고, 그것을 잊을 유일한 방법은 술에 취하는 것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시대가 암울하고 데모가 무섭고 내가 몰두할 것이 없어서 술에 몰두했고, 대학원에서는 미술사 공부가 너무 재밌고 논쟁하는 게 좋아서 사람들과 술을 마셨고, 미술운동을 하면서는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셨기 때문에 술을 마셨고, 큐레이터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도피처가 필요해서 술을 마셨다.


대안공간을 드나드는 몇몇 친한 미술가들과 마시는 술은 쓰고도 달았다. 우리는 인사동과 낙원동의 단골 술집과 노래방, 홍대의 클럽, 그리고 허름한 우리 집에서 술에 취해 토론하고 논쟁하고 싸우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여기저기서 소소한 파티도 자주 있었는데, 그저 끼리끼리의 사람들과 변변치 못한 안주와 싼 술에 취해 춤추고 노래하는 정도였다. 한 번은 내가 홍대 앞의 공간을 빌려 파티를 주최하기도 했다. 재밌게 하자 해서 이름하여 ‘음란파티’. 최대한 야한 복장을 하고 올 것. 이미 술에 취한 상태여야 입장 가능. 안주는 없으며 정체불명의 술(막걸리와 소주와 요구르트를 섞은 것)만 제공. 사진 촬영 금지. 파티에서 있었던 일 발설 금지. 뒷담화 금지.


그러나 내 주변의 미술계 사람들이 얼마나 속속들이 주류적인 모범생들인지 그 파티를 벌인 이후에 알게 되었다. 이태원 성인용품점에서 구입한 가터벨트와 금발의 단발머리 가발이 무색하게 제대로 파티 복장을 갖춰 입고 온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운송비를 지불하고 지인의 침대 매트리스까지 구비해 놓은 공간에서 벌어진 일은 그저 다들 신나서 막춤을 춘 것 밖에는 없었다. 물론 침대 매트리스는 분위기를 위한 인테리어였으나 다들 겁나서 거기에 다가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청소까지 마치고 시시하게 음란파티를 끝낸 우리들은 새벽에 국밥을 먹으며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후일담을 들어봐도 거기서 눈 맞은 사람들은 없었으며 다시 한번 파티를 하면 꼭 복장을 갖춰 입고 오겠다는 헛된 공약들만 난무했다.


요즘 시대라면 이렇게 주변적으로만 살아도 나름 행복하고 그 안에서 비전을 찾아갔을 텐데, 그 시절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확실했고 비주류로 사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나는 점점 주류에서 멀어짐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을 모른 체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비주류적인 파티를 열었다.  

작가의 이전글 비즈니스가 안 되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