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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취 Jul 11. 2021

새 시대에 맞는 상이 필요해

 몇개월 전에 쓴 글이다. 몇일 전에 그녀가 브런치에 가입했단 글을 보았다. 그녀의 글은 인기글로 게재되었고 그녀의 계정은 구독자 수가 쭉쭉 오르고 있다. 넘 반가운 마음에 서랍에 있던 글을 발행한다.




자주 가는 블로그가 있다. 우연히 뭔가를  검색하다가 들어갔는데, 당당하고 솔직한  빠져 이웃추가를 눌렀다. 블로거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신부였다. 결혼 관련 포스팅이 많았다. 이 글, 저 글 읽다 보니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직업도 나와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어머니에 관한 포스팅이 올라왔다. 자식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결혼 전에는 아들에게 요구하던 걸 결혼 후엔  '며느리'로 바뀌었다고 했다. 바라강도도 '해야지 should'에서 '당연히 해야만 한다 must'의 수준으로 강해졌다고 했다. 그분의 논리는 '며느리는 당연히 시부모님에게 안부전화/자주 찾아감/좋아하실 만한 거 사가기/ 명절에 가서 자기/설거지/김장 도우기 등해야 해'였다.  시가와 겹쳐 보였다. 글을 읽다 보니 그녀에겐 나와 다른 게 있었다.  비판정신.






 신혼여행에 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시아버지는 내가 전화하지 않은 게 많이 언짢으셨나 보다. 며칠 후부터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엄청 화났다며 대신 알려준다고 몇 번 전화를 하셨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건가. 우리 집은 남편이 전화 안 했어도 별생각 없는데. 왜 그러시지?'

라고 생각했지만 기분이 상하셨다니 별도리가 없었다. 방문하기로 했던 새벽에 엄마가 준비한 이바지 음식을 잔뜩 들고 시가에 갔다. 토요일 아침 8시 반. 시아버지는 내게 너와 네 남편은 다르다그러면 안되는 거라 하셨다. 그리고는 한복 입고 간 날 데리고 큰집 뒷산 중턱에 있는 시할아버지 산소에  데리고 가셨다. 수풀을 헤치며 미끄러질까 치마를 부여잡으며 돌을 찾아 밟아가며 천천히 올라갔다 겨우 내려왔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는 게 중요했을 뿐 앞에 있는 사람이 느낄 불편함, 어려움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과정이 내게 자신의 집안에 복종하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너는 아랫사람이야. 시작이었다.




 설 명절 임신 7개월 남산만 한 배를 부여잡고 시어른들에게 절을 했다. 시아버지는 하루 종일 여기저기 나를 친척집들에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키셨다. 무거운 배를 안고 절을 하고 몇 시간씩 앉아 덕담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중노동이었다. 쓰러질 듯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뭔가  이상함은 느꼈는데,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어른에게 '하기 싫다,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잘못된 행동인 것 같았다. 그날 만난 그 집 사람들은 30명이 족히 넘었는데 나 말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상황은 지극히 당연했다. 표정은 굳어갔고 억울함이 점점 커져 갔다.


 '결혼을 하며 시가에 뭐하나 요구한 게 없는데, 식 준비도 다 내가 했는데, 시아버지 시어머니 직업, 집 뭐하나 묻고 따진 게 없는데, 그분들 자체로 사랑하는 남자 친구의 부모님이니 받아들였는데. 그들은 왜 이리 나에게 순종하고 자신들에게 맞출 것을 강요하는 걸까?'

 

그 집 어른들은 내게 첫 만남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며? 공부 잘했다고 시부모 무시하지 마라"라고 했다. 실상은 반대였다. 시부모라는 이유로, 내가 본인들의 며느리라는 이유로 내 감정,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게 시가에선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동안 '왜 나는 억울함을 이리 느낄까 내가 이상한 걸까.' 자신을 의심했다. 남편이 누워 잘 때 아이를 보며 혼자 설거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곳, 30년간 살아온 나는 없고 며느리로만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시가였다.






 그녀는 나와 달랐다.  시대에 필요한 비판정신을 바로 표현할 줄 알았다. 무조건 해야 하는 당연한 건 없고, 사람 간 관계의 기본인 상호 존중에 입각하여 시가와의 관계를 만들었다. 처음 자기주장을 했을 땐 씨알도 안 먹혔지만 계속 반박하니 화를 내 결국 같이 싸웠다고 했다. 발 길을 아예 끊으니 주춤했고, 다음에 시가에  먼저 갔을 때 '와줘서 고맙다'로 끝났다고 다. 그녀 본인을 쌈닭이라고 지칭했고 그래서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녀가 부러웠다. 오랫동안 남편이 관계를 대신 중재해주길 바라 내 기분과 입장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6년 동안 남편의 부모에 대한 사랑만 확인한 후였다. 



 그녀는 이미 인도 여행으로 책도 출판했고 다양한 자신의 일상을 글을 재밌게 써서 인기가 많은 블로거였는데 시어머니와의 일화를 쓰고 나서부터 댓글이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읽은 후 불편함을 표현하며 며느리로서 할 도리를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걸 보며 용기를 얻었다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나는 당연히 두 번째 부류였다. 평소 시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밖에서 제대로 한 적이 없었. 그게 남편, 시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분 글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나 혼자 그리 생각하고 존중하면 뭐하나. 오히려 난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될 뿐인걸. 그렇게 시가 관련 글을 쓸 용기를 얻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이 내 통지표에 써준 말은 "순종적이다"였다. 더 어렸을 때로 돌아가 보면 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운 기억이 많다. 막내 삼촌은 내게 까칠한 게 매력이라 말해주었다.  하지만 삼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겐 그저 불만 많은 아이일 뿐이었다. 언니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었고, 어른들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었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12년을 살며 만들어 낸  순종은 이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가면을 벗을 때인가. 이미 무엇이 가면인지 나인지 잘 구분이 안된다. 그래도 마음의 소리를 귀 기울여 계속 표현하다 보면 여성도 고등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 새 시대 상에 부합한 캐릭터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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