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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취 Nov 19. 2021

경기순환곡선

 경기 순환 곡선. 장기적 관점에서 경기는 항상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물가, 고용이 상승하는 시기와 하락하는 시기가 주기적으로 순환을 반복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과를 선택했다. 대게 국어, 사회를 좋아하거나 수학, 과학이 싫다는 이유로 문과를 선택하지만 렇진 않았다. 공식만 외우면 문제를 풀 수 있는 수학이 좋았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배우는 사회가 좋았다. 한쪽을 고르기 애매했다. 언니가 문과를 갔으니까. 별생각 없이 따라 선택했다. 문과를 선택하고 나니 사회 심화과목골라야 했다. 외울게 엄청 많아 보이는 세계사, 지루할 거 같은 지리보단 경제가 재밌어 보였다.



 첫 시간. 하얀 얼굴, 큰 눈, 여리여리하고 작은 체구. 딱 봐도 우리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보이지 않는 앳된 외모. 처음 보는 선생님이 들어왔다. 서울대 교수 출신 교장선생님이 부임한 이후 서울대 출신 젊은 교사들이 학교에 들어왔다. 그녀도 그중 한 명이었다. 뭐가 다르려나. 엎드려 자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수업이 대부분인데. 그녀는 자기소개를 하며 핑크색을 좋아한다 했다. 샤랄라 한 원피스. 딱 공주과로 보였다. 그 이후 우리는 그녀를 핑크쌤이라 불렀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는 필요하지 않았다. 직접 만든 교재를 파일로 홈페이지에 올려놓을 테니 우리에게 다운받아 인쇄해 오라고 했다. 그녀의 설명은 명료했다. 본인이 만든 교재로 설명하니 막힘이 없었다. 수업의 흐름이 자연스러웠고 인과관계가 뚜렷했다. 설명을 들으며 관련 내용을 교재에 빼곡히 적었다. 전혀 졸리지 않았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남편에 대한 사담부터 시시콜콜한 농담까지 모두 새겨들었다.



 중간고사 기간이 되자 핑크쌤은 경제를 배우는 모든 반에 가서 시험을 100점 맞으면  목동 백화점 11층 식당가에서 파스타를 사준다고 했다. 백화점에서 파는 파스타라니. 뭔가 부티가 다. 한 달 후 그녀가 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전교에 100점을 맞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나와 모르는 애 한 명. 이왕이면 남자반 학생이길 바랐다. 한 학년이 18반까지 있던 엄청 큰 우리 학교에는 같은 학년 이어도 모르는 애가 수두룩 했다. 문과 중 경제 선택, 다른 층에 교실이 있는 여자반 처음 보는 였다. 토요일 점심. 처음 가보는 동네. 하얀 소스에 베이컨이 들어있는 까르보나라를 먹었다. 그 이후 경제 수업에 더 집중했다. 고급스러워 보이고 능력 있게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좋았다.



 "경기 순환 곡선을 보면 경기가 호황기, 후퇴기, 불황기, 회복기 다시 호황기가 반복되며 끊임없이 변동해. 그래프의 이 좁거나 넓거나 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영원한 호황도, 불황도 없어. "



 쌤의 설명을 들으며 곡선을 따라 그렸다. 경제의 주요 지표인 생산, 물가, 고용 정도를 그래프로 표시한 경기 순환 곡선은 위에 있다가도 내려오고 아래에 있다가도 올라가며 변했다. 계속 바뀌는 것이 마음 같았다. 좋을 때가 마낭 지속되지 않고, 계속 우울하지만도 않는,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 대학생이 되어 핑크쌤에게 배운 경제 수업 내용은 대부분 다 잊혔지만 경기 순환 곡선은 우울과 불안에 빠질 생각이 났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냥 그런 시기인 거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조금만 지나면 그래프를 따라 다시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은 부정적인 감정에 깊이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핑크쌤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학교를 휴직했고 나중엔 그만두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했다. 쌤을 보기 위해 찾아간 집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원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결혼을 하며 유학을 포기했다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도 그만뒀고 곧 금융업에 종사하는 남편을 따라 홍콩에 간다 했다. 그녀는 여전히 우아했고 한강변에 위치한 집은 화려해 보였지만 어딘가 아쉬운 기색이 느껴졌다.



 처음 났을 때 그녀의 나이가 되었다. 결혼을 했고 아기를 가졌다. 아기는 축복이지만 산후 우울증에는 곡선을 떠올리는 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재우기, 먹이기, 치우기 등 할 일들로 빼곡한 매일 반복되는 일상. 면역력이 떨어져 골골대며 아픈 몸, 감옥같이 느껴지는 집,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내일들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닥을 기는 직선이 앞으로 쭉 이어졌다. 그냥 우울했다. 다른 곡선이 필요했다. L자형 경기순환 곡선. 경기가 침체에 빠진 후 장기간 불경기가 지속되는 패턴. 경기가 바닥을 탈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저점인 상태에서 계속 머물러있는 회복불능의 시기였다. 

  


  "엄마 팔을 흔들면서 뒤를 돌아봐. 그리고 엉덩이를 한 바퀴 돌려. 그럼 한약 먹을게."

비염을 고치기 위해 재난지원금을 다 털어 한약을 사줬건만. 아이는 엄마의 약점이라도 잡은 듯 한약 먹는 걸로 협상을 하려고 한다. 그것도 엄마를 춤추게 만드는 장난을 섞어서. 아이는 훌쩍 컸다. 바닥을 기던 직선이 서서히 올라왔다.  나이키형 곡선이다. 경기가 빠르게 침체된 후 오랜 시간에 걸쳐 회복되는 패턴. 아이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주가가 뚝 떨어졌을 때 주식을 시작했다. 계좌 개설 이벤트로 받은 1주만 잘 갖고 있으려 했는데 어느새 빼곡해졌다. 주가 변동 추이를 본다. 주식은 저점에 사서 고점에 파는 게 중요하다. 지금 어디쯤 있을까. 무슨 모양으로 변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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