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프로포즈 로망이 있을까
2022년 7월 30일
남자친구에게 깜짝 프로포즈를 했다.
2년 넘게 만나온 남자친구와 결혼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와 양가 부모님 허락 등등으로 추진하는 게 쉽지 않았다. 누군가의 결단이 필요했고 내가 프로포즈를 하기로 했다. 이 프로포즈 이벤트는 그동안의 '로망'도 반영된 기획이었다.
20대 연애를 한 마디로 하면 '어렵다'. 남들 다 잘 하는 연애가 나에겐 유달리 어렵게만 느껴졌다. 친구들은 잘만 1~2년씩 연애를 이어가는데 나는 그게 어려웠다. 이유를 고민해보고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게 어려운 일이구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연애에 서툰 나는 늦게 깨달았다. 단순히 매력이 있고,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고 연애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마음이 부족하면 관계를 지속하는 일 자체가 힘들다는 걸. 그때부터 나에게 로망이 생겼다.
내가 프로포즈를 해주고 싶을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결혼할래!
프로포즈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고민이 됐다. 대체 뭘 해줘야 좋아할까? 주변 사람들이 받은 프로포즈 사례들을 청취했다. 호텔이나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많이 했고 명품백이나 목걸이, 반지 등을 선물하는 게 일반적인 것 같았다. 남자들은 어떤 걸 받으면 좋아할지 감이 안왔다. 그래서 남자 동료들에게 물어봤다.
"만약 프로포즈를 받는다면 어떻게 받고 싶나요?"
이 질문에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내 남자친구도 프로포즈 자체에 대한 로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준비하는데 더 고민이 생겼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래, 그거다!"
이벤트를 하려면 일단 돈이 필요했다. 주섬주섬 쌈짓돈을 확인하고서 몇 달간 돈을 더 모았다. 대충 모으니 그래도 200만 원 정도 모였다. 그리고서 파인 다이닝을 예약했다. 선택한 곳은 더플라자호텔에 있는 주옥이었다. 남자친구는 파인 다이닝을 참 좋아한다. 돈 없는 대학생 시절 파인 다이닝을 가기 위해 알바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식당에 데려가고 싶었다. 한식 파인 다이닝이라서 특별하기도 하고 광장뷰가 멋있다는 리뷰를 보고 예약했다.
그리곤 꽃다발을 주문했다. 연애하면서 몇 번 꽃집을 지나다가 꽃 한 송이 사준 적은 종종 있었는데 이렇게 큰 다발은 한번도 없었다. 인스타에서 열심히 서치해서 배송 주문하고 식당에 말씀 드려 꽃다발을 받아달라고 했다.
꽃다발과 함께 줄 선물은 무드 없지만 현금을 준비했다. 남친이 좋아하는 비싸고 좋은 와인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와인을 잘 모르는 내가 고르는 건 무리였다. 결국 고민 끝에 남친의 로망이었던 '30살에 100만 원짜리 와인 사서 마셔보기'를 실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드 없는 선물을 골랐다. 대신 편지도 함께 준비했다. 편지와 선물은 꽃다발에 숨겨두고 식당에 맡겼다.
이번엔 누나가 파인 다이닝 쏜다!
남자친구는 연애할때 종종 날 데리고 파인 다이닝에 갔었기 때문에 이번엔 내가 쏘는 것처럼 말했다. 정말 비싼 밥을 사주는 거라고 생각한 남친은 주옥 코스요리를 유튜브로 열심히 찾아보고 기대하며 따라왔다. 한국 파인 다이닝 중에서도 모수와 주옥을 가고 싶어했던 남자친구는 꽤나 설레보였다.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 계속 나왔고 창밖으로 보이는 뷰도 예뻐서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게 보였다.
대망의 디저트 타임. 직원 분께서 특별히 미니 케이크에 촛불을 올려서 준비해둔 꽃다발을 건네주셨다. 남자친구의 놀란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나가는 말로 "내가 프로포즈 할거니까 네가 하면 안된다"라고 한 적이 있어서 예상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놀랐다고 한다. 감정기복이 크지 않은 사람인데 감동한 얼굴이 여과없이 보여서 더 뿌듯했다.
우린 그렇게 결혼 준비를 시작했고 약 9개월 만인 올해 4월 결혼했다.
1년 만에 프로포즈 썰을 풀다보니 새록새록 그때가 떠올라 남편에게 프로포즈 받고 어땠냐고 물어봤다. "정말 놀랐다. 별 기대 없었는데 선물을 받는 기분"이라는 다소 무미건조한 평을 했다. 확실히 로망이 없어서 일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는다. 오히려 프로포즈 하고 싶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새댁인 지금의 나, 이런 마음으로 오랫동안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당장 많은 것을 갖고 시작하지 않지만 서울살이 힘들다고 푸념하기 보다는 서로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긴 타지생활을 하던 저희가 가족이 된 만큼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살겠습니다.
- 혼인서약서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