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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맑음 Mar 06. 2022

1인칭 춘희 시점

천명관의 “고래”를 읽고..

극장에 불이 났다. 800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 현장에 내가 있다. 숨이 막힌다. 독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소름 끼치는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잠이 온다. 불기둥이 치솟는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든다. 차가운 감옥에 갇혀 밤마다 불속을 헤매는 꿈을 꾼다. 말하고 싶은데,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 외모가 그렇게 이상한가. 경찰서에 잡혀 간 날 그들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얘가 진짜 극장 주인 금복이 딸 맞아?!

-글쎄, 그렇다는데.. 엄마와는 다르게 진짜 못생겼네.

-너! 왜 밖에서 비상구 문을 다 걸어 잠갔어?!

-제가 안 그랬어요. 저 아니라고요! 밖에서 비상구를 걸어 잠근 건, 국밥집 노파예요!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저 진짜 억울해요!

-글쎄, 그날 노파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시각 그곳을 빠져나온 사람은 너 하나뿐이라고! 그리고 너 몇 년 전에 다방에도 불 지른 적 있다며? 어디서 오리발이야?!


의심은 확신이 됐다. 외딴 벽돌 공장에 버려진 내가 복수심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 경찰의 추측이었다. 내 진술과 상관없이 그들의 입맛대로 조서는 꾸며졌고 기소를 위한 마지막 사인만 남았다.

-여기에 사인해.

-저, 글씨 쓸 줄 몰라요.

-점을 찍던 선을 긋던 아무거나 그려.

나는 연필을 잡고 열심히 꽃을 그렸다.

-이게 뭐야? 살인범이 예쁜 꽃 그림을 그리다니..

-그런데 이거 무슨 꽃이지? 어이, 너! 이 꽃 이름이 뭐야? 뭘 그린 거야?


춘희가 그린 “개망초”

개망초다. 보기만 해도 행복한 개망초다.

-문 아저씨가 그러는데, 계란을 닮은 이 꽃의 이름이 개망초래요. 기차 타고 평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 꽃이 저를 반겨줬어요. 그리고 제가 살던 벽돌 공장 주변에는 이 개망초 꽃이 엄청 많이 피었어요. 엄마가 그리워서 눈물이 날 때마다 저를 위로해 준건 언제나 이 꽃이었어요. 개망초는 제 친구예요.


교도소에 있다. 교도소 우두머리는 상상 그 이상이다. 간수 중에 무당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자가 있었다. 그의 얼굴엔 무당벌레처럼 여러 개의 점이 있었는데, 체구는 볼 품 없이 작았으며 보잘것없었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 야! 바크셔! 너 힘 어마어마하게 세다며?! 남자 감옥에서 격투기 시합 열리는 거 알지? 네가 출전해 줘야겠어. 나는 그 경기에 전 재산을 걸었거든. 너는 무조건 이겨야 돼!

-난 남자도 아닌데 내가 왜 격투기를 해야 되지요?! 저 싸울 줄도 몰라요!

-뭐?! 이년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잘 들어! 만일 상대방을 붙잡으면 머리를 옆으로 비틀고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쳐! 그러면 상대가 정신을 잠시 잃을 거야. 그때 사정없이 얼굴을 물어뜯으라고! 내 말 알겠어?!

-싫어요. 못해요. 저 무서워요. 안 하고 싶어요!

-네년 얼굴 먼저 물어뜯어줄까?! 넌 시합에서 반드시 이겨야 돼! 전 재산이 걸렸으니까 말이야!!


격투기장이다. 여기저기 불이 반짝인다. 남자 죄수들의 야유와 함성, 뜨거운 열기에 땀이 줄줄 흘렀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어지러웠다. 종이 울리자마자 상대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 힘에 밀려 나는 뒤로 넘어졌고 내 배 위에 올라탄 그가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본능적으로 피한 뒤, 연이어 날아든 주먹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그만해! 무섭단 말이야! 나는 싸우기 싫어!

-어쭈! 내 주먹을 막았어?! 이거 놓지 못해! 이 손 놓고 쳐봐! 한 번 쳐보라고!

나는 그저 팔을 밀어냈을 뿐인데, 그의 팔이 꺾여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붉은 피를 보고 무서워서 무작정 도망쳤다.


무당벌레는 한 시간이 넘도록 발과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때렸다.

-돼지 같은 년! 거기서 도망을 치면 어떻게! 너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도망쳤지?! 내 돈! 내 돈 내놔 이년아! 죽어! 죽으라고!!

비릿한 피가 입속에 퍼지자, 무당벌레가 가르쳐준 기술들이 떠올랐다. 무당벌레를 힘으로 제압해 때려눕히고, 관자놀이를 힘껏 쳤다. 그가 휘청이며 뒤로 넘어가자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나는 그만 이성을 잃었다.

-이 개새끼야!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 싸우는 거 싫다고! 못한다고 했잖아! 다들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세상이 왜 나에게만 이토록 잔인하냐고!!


출소 후 벽돌 공장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산속 깊은 곳에서 나는 살기 위해 동물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다시 벽돌을 굽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트럭을 몰고 찾아왔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나는 반가움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내는 아주 오래전 이곳에서 나와 팔씨름을 겨뤘던 아이였다. 그는 내가 만든 벽돌을 내다 팔아 온갖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사다 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선물이란 걸 받았다. ‘노란 원피스’ 그 옷을 입고 수줍어하는 나에게 그는 ‘노랑 병아리’라고 불러주었다. 바크셔, 돼지로만 불리던 나였는데, 그가 나를 노랑 병아리라고 불러 주었을 때 처음으로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여자의 행복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임신을 했다. 그는 떠났다. 자신의 말대로 약속 없이 떠났다. 태어난 아기를 보니 몸 전체에 좁쌀 같은 것이 새빨갛게 퍼져있었다. 몸은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아픈 딸을 안고 집을 나서니 폭설로 무릎까지 눈이 쌓여있었다. 거센 눈보라가 얼굴을 때렸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꽁꽁 언 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깊은 눈밭에 딸과 함께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눈 속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어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놀라서 얼른 몸을 일으키고 아래를 살펴보니 눈 속에 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아가! 아가! 숨 쉬어봐! 아가!

거대한 슬픔이 목울대를 밀고 터져 나왔다.

-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기나긴 세월의 모든 외로움과 고통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목이 찢어질 만큼 처절하게 울고 또 울었다.


나도 따라 죽고 싶었다. 그러나 질기디질긴 생명력은 나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살기로 했다. 다시 벽돌을 굽기 시작했다. 벽돌을 찍어 낼 때마다 아기의 부드러운 뺨과 애벌레처럼 연약한 손가락, 그리고 내 젖을 빨던 귀여운 입이 떠올랐다. 나는 벽돌을 구워내기 전 부드러운 진흙 위에, 나뭇가지로 아기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딸을 원 없이 그리고 나면 개망초, 뱀, 메뚜기, 잠자리, 고라니, 모루, 코끼리 점보 등을 그렸다. 내 기억 속 풍경을 벽돌에 새길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춘희가 벽돌에 그려넣은 풍경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뒤덮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오랜 친구 코끼리 점보가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물었다.

-죽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어?

-엄마가 보고 싶어. 아기였을 때 엄마 손을 꼭 잡았던 따뜻한 기억이 있어. 엄마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늘 엄마 품이 그리웠어. 그래서 딸에게 정말 좋은 엄마가 돼주고 싶었는데.. 천국에서 엄마와 내 딸을 만나고 싶어. 셋이서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꼬마 아가씨, 그동안 혼자 살아내느라 고생했어. 꼭, 엄마와 딸을 만나길 바랄게. 꼬마 아가씨, 안녕.

-응, 코끼리 점보, 너도 안녕.



춘희는 죽기 직전까지 외롭게 벽돌을 구우며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춘희에게 벽돌은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대극장을 짓기 위해 훌륭한 벽돌 자재를 집요하게 찾던 어느 건축가에 의해 춘희의 벽돌이 세상에 알려졌다. 춘희가 남긴 수십만 장의 붉은 벽돌은 기적이었다. 세상에 나가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길 바랬던 춘희의 벽돌은 대극장이라는 웅장한 건축물로 다시 태어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춘희는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다.




천명관의 장편 소설 “고래” 추천합니다.


오래전 출판계를 들썩이게 했던 천명관 작가의 소설 “고래 최근 추천받아 읽었다. 45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지만 순식간에 읽혔다. 수많은 인물  유독 “춘희라는 인물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벙어리였기에 마음의 소리를 내지 못했던 춘희. 거구 지능마저 낮았던 그녀에게 세상은 유독 가혹했다. 나는 춘희에게 목소리를 빌려주고 싶었다. 위에  대사체의 상당 부분을 춘희시점으로 요약 각색 것이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계란을 닮은 잡초 같은 꽃, 개망초. 꽃말이 “화해”라고 한다. 새하얀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밭에서 해 같이 웃고 있는 엄마 금복과 춘희, 그리고 어린 딸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개망초는 곧 춘희였다. 이제 길에서 개망초를 만나면 춘희를 어루만지듯 쓰다듬게 될 것 같다. 춘희! 그녀의 삶이 궁금하다면,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읽어보시라. 천명관 작가의 미친 필력에 정신없이 휘둘리게 되리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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