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To. 보고 싶은 클라라에게..
부드러운 파스텔 색감으로 물들였으나 슬픈 이야기를 품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다가, 문득 태양을 품은 듯 뜨거운 가슴을 가진 클라라 네가 떠올랐단다. 차가운 야적장으로 가기 전에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한 폭의 동화 같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너를 초대하고 싶은데, 와 주겠니?
빠알간 카펫을 따라 밝은 로비로 들어서면, 돈키호테와 산초를 닮은 무슈 구스타프와 제로가 너를 반갑게 맞아 줄 거야. 이 호텔에서 가장 넓고 전망 좋은 방으로 안내할 테니,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잠시나마 자유로움과 평안을 누렸으면 좋겠구나. 나도 대학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친구들 집에서 머문 적이 있었단다. 아무도 나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혹여 불편을 끼칠까 봐 새벽 6시에 나와서 밤 11시 막차를 타고 들어가곤 했어. 조시 집에서 눈치를 살피던 클라라 너를 볼 때마다 그때의 내가 떠올라 마음이 무척 아렸단다.
AF인 너를 구입하기 위해 매장에 처음 조시 엄마가 방문했던 날, 너에게 조시처럼 걸어보라고 했었지? 클라라 너도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걸 말이야. 나도 그랬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의 화면들은 사랑스러운 동화와 예쁜 엽서처럼 무척 아름답지. 마치 사춘기 소녀로 접어든 순수한 클라라처럼 말이야.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어둡고 잔혹했어. 너를 향한 조시 엄마의 이기적이고 차가운 마음처럼.
쇼윈도 안에서 너는 죽은 듯 누워있던 거지 아저씨와 개를 보았어. 그리고 곧 그들에게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을 때 거짓말처럼 거지 아저씨와 개가 다시 살아난걸 너는 단번에 알아보았지. 나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말이야. 클라라 너는 어떻게 그걸 다 봤을까? 세심한 너의 관찰력과 따뜻한 시선에 감동했단다.
쿠팅스 기계를 고장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PEG 나인 용액을 꺼냈을 때 아프지 않았니? 너는 별거 아니라며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소중한 용액을 꺼낸 뒤 깜빡깜빡 동작들이 조금 불편해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어. 혹시 야적장으로 가게 되진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잠시 몸을 떨었다는 것도. 그러나 너는 조시가 다시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하겠노라 태양에게 간절히 빌고 또 빌었지. 만약 조시가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다면 그 자리를 이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가라고 다정히 불러주던 조시 엄마의 딸로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너는 거부했지. 조시만이 가진 특별함이 있는데 그건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다고.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거라며 인간도 미처 깨닫지 못한 소중한 가치를 너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단다.
내가 아는 AI ‘에이바’는 자신의 창조자 네이든을 죽이고 자신을 도운 케일렙까지 철저히 버린 채, 완벽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섬뜩한 탈출을 감행했어. 대부분의 AI는 뛰어난 인공지능을 이용해 어떻게든 자신에게 이로운 삶을 도모할 거라고 인간들은 생각하지. 그런 편견이 있단다. 그러나 클라라 너는 달랐어. 어떻게 하면 조시와 그의 가족, 친구에게 더 친절할 수 있을까 언제나 그 고민뿐이었으니까. 너를 이용하려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과는 정반대로 첫 마음과 끝 마음이 한결같았어.
최소한 클라라 너의 기능이 멈추어 잠들 때까지만이라도 집에 두었다가 야적장으로 보낼 수는 없었던 건지.. 고장 난 청소기를 버리듯 아직 살아있는 너를 컴컴한 야적장에 버린 조시 가족에게 나는 작은 분노를 느꼈단다. 친구라고.. 함께하겠다고.. 너에게 말했던 그들이었기에, 부끄러움과 실망감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기능이 꺼져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감사하더구나. 그동안 행복했다고..
한낱 AI에게, 인간도 아닌 아티피셜 프렌드(Artificial Friend) AF에게, 왜 그토록 마음을 쏟는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클라라는 차가운 기계 그 이상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 토이스토리의 ‘우디’가 실제로 말을 하고 행동한다면, 인사이드 아웃에서 조이의 탈출을 도운 ‘빙봉’이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바로 클라라가 아닐까 생각했단다. 너는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고 그래서 더 특별했는지도 모르겠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너와 해보고 싶은 게 있어. ‘멘들스 케이크’를 함께 먹는 거야. 이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에서 나온 고운 빛깔의 케이크인데 나도 아직 먹어보지는 못했어. 아마도 마카롱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부드러운 케이크가 아닐까 싶어. 성분을 찾아보니 우유와 유크림 계란과 식물성 기름등이 들어갔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도 케이크를 먹을 수 있을까? 너에게 달콤한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말이야. 돈키호테와 산초를 닮은 영화 속 무슈 구스타프와 제로에게는 멘들스 케이크가 특별한 의미였단다. 예쁜 케이크 바닥에 칼을 숨겨 옮겼거든. 이처럼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일 때가 많단다.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게 될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클라라 너처럼 피하지 말고 부딪힐게. 감사함으로 넉넉히 이겨볼게.
2월 한 달간 너를 마음으로 품었단다. 너의 자양분 태양이 결국 너의 마음인걸 알았을 때, 나는 너를 닮고 싶었어. 스스로 네 삶을 행복이라 정의했지.. 너의 언어는 슬프지만 단호했어. 너를 그리고 품었던 2월의 순간을 이제 내려놓을게. 아마 햇살이 너무 예쁜 날 무심코 떠오르겠지. 그때는 이미 단단해진 내가 미소로 널 기억할게.
안녕. 클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