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마치 하나님, 조물주, 신이 되어 눈먼 인간을 내려다보는 여자가 있다. 전염병처럼 눈이 멀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안과 의사 아내. 내가 믿는 하나님께 올바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며 응답의 방법이 따뜻한 시선이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 [눈먼 자들의 도시] 의사 아내에게 관통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짐승이 되지 않도록
이성과 지성을 일깨우는 목소리들!
극한의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감성과 영혼을 어루만지는 목소리들!
결국 영혼을 살리는 힘은 무엇일까.
#1 신호 대기 상태의 도로
노란 불이 들어왔다. 차 두 대가 빨간불에 걸리지 않으려고 가속으로 내달았다. 횡단보도 신호등의 걸어가는 사람 형상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스팔트의 검은 표면 위에 칠해진 하얀 줄무늬를 밟으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 줄무늬를 얼룩말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에 그것처럼 얼룩말을 닮지 않은 것도 없을 것이다. 안달이 난 운전자들은 클러치를 밟은 채 당장이라도 출발할 태세였다. 차들은 곧 내리 꽂힐 채찍을 의식하여 신경이 예민해진 말처럼 앞뒤로 몸을 들썩였다. (9p)
“뭐지, 이렇게 막힐 리가 없는데..”
“눈이 안 보여. 눈이 안 보여. 눈이 안 보여.. 요.”
: 예측하지 못한 불행. 누가 불행을 미리 예견할까. 도로에 줄지어 달리던 차가 멈추기만 해도 일상의 평온함은 깨진다. 달리던 차가 멈추어버린 상황. 병목현상에서 사람들은 예측한다. 맨 앞차가 문제일 거라고. 우리에게 있어 불행의 유발자는 언제나 타인이다. 크락션을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던 사람들. 그들은 몰랐다. 그들 역시 곧 눈이 멀고, 삶의 시동이 꺼질 거라는 걸.
#2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차 안
눈이 먼 남자는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공포를 억누르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눈이 먼 남자는 초조한 마음에, 얼굴 앞으로 두 손을 내밀어, 그가 우유의 바다라고 묘사했던 곳에서 헤엄치듯이 두 손을 휘저었다. 입에서는 벌써 도와달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13p)
“도와주세요. 앞이 깜깜하지 않아요. 우유색이에요. 온통 우유색이에요. 하얘요.”
“내 손을 잡아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선천적으로 눈이 머는 것과 사고로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갑자기 암전이 되면 희미한 불빛을 찾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열어두기라도 할 텐데, 뿌옇게 흐려진 우유의 바다처럼 보이는 상황이라면 생각보다 더 막막하겠지. 오래전, 번화한 시내 8차로에서 차가 멈춘 적이 있다. 버스와 택시, 밀물처럼 쏟아지는 차들의 쉴 새 없는 크락션을 받아내며 레커차가 올 때까지 진땀을 흘렸다. 알 수 없는 공포는 무섭다. 결과를 아는 공포는 덜 무섭다. 인간이 그렇게 나약하다.
#3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차를 뺏은 도둑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머릿속의 거미줄이 날아갈지도 모르지, 그 불쌍한 작자가 장님이 되었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돼란 법은 없는 거잖아, 그게 뭐 감기처럼 옮는 것도 아니고, 동네 한 바퀴 돌면 괜찮아지겠지. 도둑은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은 잠그지 않았다. 곧 돌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서른 걸음도 못 가서 눈이 멀고 말았다. (35p)
“처음에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단지 그뿐이었어요.”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내 눈앞에 돈이 될만한 물건이 있는데 물건의 주인이 장님이라면,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나요?”
“차를 훔쳐서 눈이 멀었다고 말하지 마세요. 죄를 지어서 받는 형벌이라고 말하지 말라고요!”
:책의 도입부다. 타락하고 추악한 모습을 보기 전에 만나는 상황은 단순하게 벌을 받아 눈이 멀었다고 이해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 괴로워하고 불행해지면 인과응보라고 쉽게 말한다. 누가 불행을 자초하며 예측할 수 있었을까. 차를 훔친 남자의 변명이라도 들어야 했다. 처음 눈이 먼 남자의 손을 잡아줄 때는 마음의 온도가 따뜻했을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4 첫 번째로 눈먼 남자를 진료한 안과 의사
그러다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그도 곧 눈이 멀 운명이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의사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일은 잠시 후, 의사가 책을 모아 책꽂이로 가지고 갔을 때 일어났다. 처음에 의사는 자기 손이 안 보인다고 느꼈다. 이어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았다. (39p)
“아.. 안 보여.. 우유의 바닷속에 빠진 것 같아. 어쩌면 이건 전염병이겠구나.”
“아내를 곁에 못 오게 해야 해. 그리고 어서 정부에 이 심각성을 알려야 해”
:눈이 먼다는 것이 감기처럼 전염이 될 거라고 안과 의사도 예측하지 못했다. 2년 전(그리고 여전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공포와 대혼란에 빠진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안과 의사는 지성인답게 문제의 심각성을 빠르게 인지하고 정부에 알렸다. 곧 격리 수용소에 들어가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먼 안과 의사는 장님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장 쓸모없는 의사가 된 것이다.
#5 의사에게 진료받은 검은 색안경을 쓴 여인
10분 뒤에는 벌거벗었고, 15분 뒤에는 신음을 토했고, 18분 뒤에는 굳이 꾸밀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의 말을 소곤거렸고, 20분 뒤에는 정신을 잃기 시작했고, 21분 뒤에는 몸이 쾌락으로 찢겨나가는 기분을 느꼈고, 22분 뒤에는, 지금이야, 지금이야, 하고 소리쳤고, 지치고 행복한 상태로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에는, 지금도 모든 게 하얗게 보여, 하고 중얼거렸다. (43p)
“아저씨, 앞이 안 보여요.”
“아저씨, 도와주세요. 제 옷 좀 찾아 주세요.”
“부끄럽다고요..”
:오르가슴의 정상에서 눈이 먼 여자가 있다. 그녀가 맛본 극한의 기쁨과 환희는 슬픔과 절망으로 바뀌었다. 결국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건가. 어쩌면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손에 함께 쥐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다. 결막염을 앓고 있어 외출 시에만 검은색 안경을 썼던 여인은 이제 24시간 암전을 보게 되었다. 하얀 우유의 바다에서.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만이 보게 된다면..’이라는 가상의 설정을 바탕으로 시작한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완독했다. 이 책에는 따옴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활자가 쉴 틈 없고 빽빽하다. 읽는 내내 정신줄을 단단히 잡아야 했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없다. 누가 말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헷갈리며 읽게 되는 책이다. 책 읽기 진짜 힘들다 투덜거리며 글을 읽다가 불현듯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하! 이거 작가의 의도구나! 너희도 갑자기 눈먼 사람과 같은 답답함과 숨 막힘을 글 읽는 동안만이라도 느껴보라고.. 그렇지.. 눈이 멀었는데 이름이 무슨 소용이야, 누가 이야기했는지 어떻게 명확히 구분이 되겠어. 이 모든 게 작가의 설계였어!’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재독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다. 이토록 우울하고 어둡고 냄새나고 구역질 나는 책을 또 읽겠다니. 독서모임 A 작가님은 책 읽는 내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그렇기에 지금 우울한 사람,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는 절대 비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읽고 싶은 이유는,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처참한 모습들이 갖는 의미가 방대하기 때문이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는 여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독서모임 B 작가님은 네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이라고 했다. C 작가님도 1년간 붙들고 있게 될 것 같다고 한다.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리뷰를 쓸 수 있는 사유가 깊은 책이다.
첫 장면부터 마음을 사로잡는 책, 눈먼 자들의 도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돈에 눈이 멀고, 사랑에 눈이 멀고, 증오심에 눈이 멀고, 복수심에 눈이 멀고, 끊임없이 눈이 먼다. 마음의 눈이 멀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마지막 의사 아내의 말이 뇌와 심장을 관통해 들어간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