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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맑음 May 09. 2022

허공 한 줌(나희덕)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116p)

5월, 행사가 참 많은 달이다.


세아 생일. 어린이날. 제사. 조카 돌잔치. 어버이날. 엄마의 칠순.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크게 느끼는 요즘,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마음이 머무는 문장이 있다.


허공 한 줌 - 나희덕(1966~ )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아기가 모르는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 줌뿐이었지. 그 순간 엄마는 숨이 멈춰버렸어. 다행히 아기는 엄마 쪽으로 굴러떨어졌지.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우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치고 아기는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눕혔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그 옆에 누운 엄마는 그 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어. 죽은 엄마는 그제야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 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 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이야.

‘허공 한 줌’이라는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왜 가장 먼저 모성애가 떠올랐을까?


제일 먼저 네 아이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두 번 읽으니,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희생이 떠올랐다. 부모님의 얼굴이 스쳐갔다. 세 번 읽으니, 움켜잡은 것이 아기가 아닌 허공 한 줌 이란 대목에서 깊은 탄식이 터졌고, 왜 아기가 아니었을까.. 왜 허공 한 줌이었을까.. 먹먹함이 밀려왔다. 오래 곱씹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최근, 넷째(4학년) 태준이가 이런 걸 보냈지.


학교에서 썼다며 어버이날 선물로 준비한 손편지. 어떤 내용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펼쳤다가  충격을 받았다. 전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 한껏 주눅  아이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은 보통, 엄마 이러해서 감사합니다. 저러해서 고맙습니다. 시작하는 글을 쓴다. 여태 그런 편지만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완전히 달랐다. 엄마 이러해서 죄송합니다. 저러해서 미안합니다. 반성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글이었다.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했다. 누구보다 나름 괜찮은 엄마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태준이에게 무슨 짓을  거냐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태준이에게만 유독 지적을 많이 하고 잔소리를 심하게 했더라.


주눅이 들만하다. 속상한 마음에 세아에게 슬쩍 물어보니, 태준이가 누나 형아들은 모두 잘하는데 나만 못해서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태준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조종하려 했다. 욕심을 부렸다. 태준이 편지에 한 대 얻어맞고 잠시 멍해 있을 때 이 시를 만났다.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 마음을 회복하려 한다.



목적과 대가 없이도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독교에서는 부모를 “청지기”라고 한다. 주인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이라는 말이다. 그런 소명의식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첫 마음을 까맣게 잊었다. 처음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그 감격의 순간을 기억한다.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기도했던 그 첫 마음. 아이의 키가 자랄수록 그 의미는 점점 퇴색했다.


어느새 내 소유물인 양 아이를 대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한다. 잠시 잠깐 맡아서 키우는 아이. 언젠가는 내 품에서 훨훨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 욕망, 기대, 집착을 해봤자 결국 내 손에 남는 것은 허공 한 줌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한다. 허공 한 줌까지도 허공으로 돌려주려 한다는 시인의 말처럼, 자식과 나를 철저히 분리해,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어야겠다.



의기소침해 있는 태준이를 품에 안고 이렇게 말해줬다.



태준아!
편지에 쓴 행동들 다 안 해도
엄마는 태준이를 사랑해.
노력하지 않아도 돼.
태준이 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그냥 너이기 때문에.
엄마가 요즘 부쩍 많이 혼내고
지적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태준이의 단점보다
장점을 더 크게 보고 많이 봐줄게.
그리고 부드럽게 이야기할게.
엄마가 그동안 너무 미안했어.
태준아! 많이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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