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친근한 책 제목(읽은 줄 알았다)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밀란 쿤데라’ 작가의 이름은 또 왜 이리 묵직한지. 신랑이 샀는지 내가 샀는지 알 수 없는 이 책이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다. 반가운 마음에 첫 페이지를 열었다가, 첫 문장에서 얼음이 되고 말았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저도 곤경에 빠졌어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철학자들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을 이미 곤경에 빠뜨렸을게(1999년 발행) 틀림없다. 영원 회귀(어떤 형태가 끊임없이 이어짐), 니체, 철학, 프라하의 봄, 전쟁, 정치, 베토벤, 안나 까레리나, 오이디푸스, 키치. 5월 한 달, ‘참을 수 없는 독서의 무거움’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이다.
유능한 외과의사 토마시에게 사랑, 섹스, 연애, 결혼은 새털처럼 가볍다. 테레자와 결혼은 하지만 다른 여자의 성기 냄새를 머리카락에 늘 묻히고 다니는, 병적인 여성편력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그에게 섹스는 여체를 해부하는 것(상상의 메스를 들고 그녀가 정사 중 어떨 거라 궁금해하면서)과 같은 일종의 놀이일 뿐, 그런 다수의 여자들과 테레자는 엄연히 다르단다. 그도 그럴 것이 테레자는 그런 상상을 하기도 전에 사랑을 해버린 최초의 여자다.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여자는 테레자뿐이라는 토마시의 말은 사실 같다. 테레자를 향한 묵직한 사랑이 내게도 전해졌으니 말이다. 새처럼 자유롭게 살다가 테레자를 만나 꼼짝없이 새장으로 내몰리는 토마시. 그것도 필연이 아닌, 6번의 우연으로 만나게 된 테레자 때문에 그는 수없이 고민한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테레자와의 사랑에, 그의 삶에, 점점 무게가 실린다.
반면, 토마시의 유일한 여인이길 갈망하는 술집 여종업원 테레자의 삶은 한없이 무겁고 무겁다. 토마시를 소유했다고 믿었지만, 그가 머리카락에 묻혀온 다른 여자의 성기 냄새 때문에 시들어간다. 매일 밤 토마시에게 버림받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다. 테레자는 여자들, 모든 여자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다고 느낀다. 모든 여자는 토마스의 잠재적 애인이었고,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왜 그녀가 토마시를 떠나지도 못하고 그토록 집착하고 사랑하는지는, 그녀의 과거를 알고 나면 이해가 된다. 그녀의 삶을 무겁게 만들고 망가뜨린 중심에는 그녀의 엄마가 있다. 닮지 않으려고 그토록 증오했지만 현재 자신의 모습이 엄마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토마시와의 만남과 사랑을 지독한 운명이라고 믿는 테레자.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테레자와의 결혼 이후 토마시의 삶은 점점 무거워지지만, 테레자는 점점 가벼워진다.
또 다른 여주인공 화가 사비나. 그녀는 토마시, 가정이 있는 남자 프란츠와 자유로운 연애를 즐긴다. 자신에게 반해 아내를 버리고 달려온 프란츠를 과감히 버린다. 자신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거나 구속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훨훨 벗어나는 사비나.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공기보다 더 가볍게, 가벼움의 상징 속에서 죽고 싶다는 사비나. 네 인물 중 가장 가벼운 삶을 추구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유유자적 그림을 그리다가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며 걷고 있을 것만 같은 여인이다.
가정을 위해 헌신하며 최선을 다했던 대학 교수 프란츠. 가장으로서 나름 무거운 삶을 살아온 그는 어느 날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비나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 급기야 그녀와 살기 위해 이혼을 하고 (그에겐 엄청난 용기) 달려오지만, 웬걸, 사비나는 그를 피해 말도 없이 떠난다. 사비나가 떠난 자리에 20대의 어리고 풋풋한 대학생의 제자가, 사랑이 온다. 하지만 베트남에 점령당한 캄보디아인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전쟁터로 달려가는 프란츠. 그의 삶은 무거움이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인물의 사랑과 삶을 통해, 존재의,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관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가장 신비롭고 미묘한 모순이라는 주제. 그리고 질문한다. 여기에 옳고 그름이 있냐고. 그걸 누가 판단하냐고.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떤 결정이 옳고 그른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어차피 우리의 삶은 영원회귀가 아닌 일회성이기 때문에 한없이 무겁게 살 필요도, 그렇다고 한없이 가볍게만 살아도 안 된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켜야 한다고 믿는, 어떤 책임의 영역에서는 무겁게.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고 생각되는, 조금은 풀어져도 된다고 믿는 그 어떤 자유의 영역에서는 가볍게.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조절하고 조율하며 삶을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겁게 살 것인지 가볍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훗날 주인공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프란츠가 허망한 죽음을 맞는 것처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이다.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무겁고 피곤하게 살아도, 의미 없이 유유자적 새털처럼 가볍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죽음’이라는 같은 종착역을 맞이한다.
리허설도 없이 시작되는 단 한 번뿐인 인생,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 그림 같은 것이다.
나는 독서의 무거움과 리뷰 쓰기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가벼워지기 위해, 새털같이 가벼운 글을 하나 썼다. 영원 회귀, 니체, 철학, 프라하의 봄, 전쟁, 정치, 베토벤, 안나 까레리나, 오이디푸스, 키치, 가벼움과 무거움. 어느 것 하나 ‘그것은 이것이다!’라고, 100프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이 책을 너무 무겁게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평범한 연애 소설로 읽히기 원한다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가볍게 접근해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