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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 Aug 14. 2020

팬데믹 백수의 골방 속 영화 감상: 모던타임즈

숫자와 삶 사이의 괴리를 채우며

영화 '모던타임즈'의 포스터


코로나19가 만든 '팬데믹'은 모두를 타격했습니다.


잡힐 것 같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8월 3번째 주를 기점으로 수도권에서만 150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소위 코로나 블루,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한 우울증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려 합니다. 희망을 잠깐 엿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절망일 때만큼 타격이 심할 수는 없습니다.


통계청은 우리에게 경제 수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관 중 하나다 / 출처: 연합뉴스


그러는 사이 언론들은 수치를 마구 내놓고 있습니다. 20년 7월 기준 실업자가 110만 명을 돌파해 IMF 이후 최다라고 합니다. 한국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수출도 문제입니다. 8월 1일부터 10일까지 수출량을 보면 전년 대비 -23.6%라고 하네요.


분명 수치들은 우리 사회의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러할 것입니다.

"후... 한국 경제 좋지 않구나!"

그러고 포털창을 닫거나 신문을 덮겠죠. 경제에 대한 막연한 불쾌감을 가지고요. 하지만 저 수치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것도 말 못할 어려움을 겪으면서 말이죠.


사회가 나타내는 수치와 '나'는 분리돼 있습니다. 수치는 매일 접하지만 100%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책 '가난 사파리'가 그러한 맹점을 짚고 있죠. 그 계층에 속하지 않는 이상 정책, 기사 등등은 모두 추론에 기반한다고 합니다. 경제학이라 수치를 주로 다루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수치와 사람 사이의 분리가 심각해질수록 경제 주류에서 벗어난 낮은 계층을 이해하는 사회가 도래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제를 다루는 영화는 어떠해야 할까요? 저는 수치와 '사람' 사이에 생긴 간격을 좁히는 영화가 좋은 경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수치가 설명하지 않는 사회의 진짜 모습, 어려운 삶을 근근히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도 행복을 추구하려 하는 사람들의 모습. 경제학이 놓치는 '사람'을 조명하는 게 경제 영화의 역할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세상에 남은 건 단순 웃기기만 해서는 아니다


오늘 제가 택한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입니다. 이 영화는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는 표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서 회자되는 명작 중 하나죠. 왜일까요? 저는 풍자나 코미디 영화 그 이상의 경제 영화라고 인식했습니다. 즉, 대공황 시기를 나타내는 수치에 가려진 한 인물을 재밌게, 하지만 가볍지 않게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찰리 채플린은 이 영화로 수치와 사람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배제한 경제 체계에 대해 경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공황과 사람을 연결 시켰을까요?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후 내용에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인간은 출연하나 사람이 담기지 않은 공장


모던타임즈는 거시경제에서 소외된 자를 위한 경제 영화입니다. 영화 시작부터 그 점을 못 박고 시작하죠. 시작부, 영화는 '공업화된 각박한 사회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라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즉, 이 영화의 주제는 '행복'입니다. 그것도 소시민의 행복입니다.


하지만 이놈의 경제는 사람을 담질 못합니다. 주인공 채플린이 잠시 겨드랑이를 긁는 동안 컨베이어 벨트는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채플린은 다시 쫓아가 옆 사람의 공간을 침범하면서까지 일을 마무리하죠.


보통 사람 간에는 암묵적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사람 간 간격을 두며 서로의 공간을 확보하죠. 코로나19 이후 '생활 속 거리두기' 라는 키워드가 생기며 그러한 풍조는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채플린은 거리낌없이 옆 사람과 몸을 부딪힙니다. 지금, 돈이 걸려 있는데 상대의 공간을 존중해줄 여지가 있나요? 일을 마무리 못하면 그는 잘리게 될 것입니다. 즉, 돈 앞에 사람은 사라진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흰 옥수수가 털릴 것만 같다


경영자의 횡포는 더더욱 심해집니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올리는 건 약과입니다. 그는 '벨로우즈 급식기'라는 신문물을 도입하려고 하죠.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채플린은 옴쌀달짝 못하고 앉아 기계가 퍼주는대로 먹어야 합니다.


거대 경제체제에 매몰된 노동자들은 밥 먹을 시간도 아껴야 합니다. 경영자에게 이 급식기를 팔러 온 개발자는 '귀하의 경쟁자'를 앞서가기 위해서 이 기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공급을 최대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애려고 하는 거죠.


잠깐! 지금 이상한 급식기로 밥 먹이려고 하는 이 때는 대공황 전입니다. 왜 공장은 악을 쓰고 노동자를 쥐어짜려고 했을까요? 이 때는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밥티스트 세이의 '세이의 법칙'이 진리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세이의 법칙에 따르면 '공급은 수요를 만들어냅니다.' 즉, 공급하는 족족 수요로 인해 팔린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공급을 최대한 많이 하는 게 이득인 거죠. 이 때는 재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팔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결국, 대공황을 가져 오고 맙니다.


아마, 형형색색의 빛깔을 가진 '사람'을 가장 잘 나타낸 흑백영화일 것이다


여튼 식사 장면을 더 봅시다. 이 장면은 대공황의 전조 현상임을 나타내는 걸 넘어 '식사'의 의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찬수의 '식탁에서 평화까지: 식맹을 넘어 식안을 열다'에 따르면 식사는 경제 논리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식사는 인간이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이고 자연적이고 인간적이고 우주적인 행위입니다. 즉, 음식은 생명의 출발이자 수단이고, 모든 이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만큼 식사는 인간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생명조차 경제의 논리로 접근하고 만 겁니다. 옥수수, 수프 등을 음미할 시간 없이 기계는 입 안으로 음식들을 밀어넣고 있죠. 단순 빨리 먹는 것을 넘어 '삶'을 음미할 시간을 없애버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하나 더 봅시다. 이 영화가 은유하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채플린에게 음식을 먹이던 벨로우즈 급식기는 갑자기 고장이 납니다. 그래서 접시를 얼굴에 집어던지거나 옥수수 파편이 튀는 등 채플린은 괴로워하고 있죠. 하지만 그 누구도 채플린에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계만 만질 뿐, 그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경제에서 인간이 배제될 때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 지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 너가 사람을 배제하면... 나는 미쳐버리는 거야!


채플린은 톱니바퀴에도 빨려들어가는 등(인간이 경제 체계의 부속품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너무 유명한 장면이기에 설명을 생략했습니다) 계속 수모를 겪습니다. 그리고 미쳐버리죠. 경제 체계가 인간을 배제해버린 결과입니다. 그는 공장을 돌아다니며 너트 비스무리 한 것만 보면 조으려고 합니다. 그 대상 중 하나가 여비서의 옷에 달린 단추입니다. 채플린은 여비서를 따라다니며 그 옷의 단추를 조으려고 합니다. 성희롱이죠.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경제가 계속 인간의 한계를 실험한 결과, 도덕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채플린은 동료의 일도 방해합니다. 이 과정에서 채플린을 쫓아오는 동료들은 다시 컨베이어 벨트로 돌아갈 때마다 다시 작업 라인으로 돌아가는 웃픈 장면도 연출합니다. 제아무리 벗어나봤자 공장을 벗어날 수 없는 게 노동자들이었습니다.


Family man, Age 44. 자신을 드러낼 때의 '수치'스러움을 경제 '수치'는 나타낼까


채플린은 신경쇠약 판정을 받고 치료 받은 후 다시 복귀합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1929년 대공황입니다. 앞서 얘기한 세이의 법칙을 맹신했던 결과물이죠. 거대한 경제 상황이 모든 사람을 삼켜버렸습니다. 노동자들은 경영자의 요구에 따라 무한에 가까운 생산 과정에 참여했을 뿐인데 큰 피해를 입게 되죠.


채플린도 그 피해자 중 하나가 됩니다. 어쩌다가 공산주의 시위에 휘말리게 된 그는 주동자로 오해받게 되고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감옥 안 상황이 바깥보다 좋습니다. 음식도 나오고 잘 곳도 있으니까요. 거기다가 채플린은 마약 밀매업자를 잡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감옥에서 대우 받으며 생활하게 됩니다.


노안이 그녀의 승부수였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파울레트 고다드가 연기한 '소녀'가 바나나를 훔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일찍이 여의고 여동생을 돌보고 있죠. 아버지는 역시나 대공황으로 인해 직업을 잃은 나약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부둣가에서 총성이 울리고 그 총성의 대상은 아버지였습니다. 이제 진짜 그녀와 여동생들은 고아가 돼 버립니다. 다른 자매들은 소년원에 잡혀가지만 이 소녀는 노안(?) 덕분에 도망 가는 데 성공합니다.


잠깐! 이 영화에서 채플린이 연기하는 인물, 그리고 파울레트 고다드가 연기하는 인물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없다'입니다. 이들에게 이름이 없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대공황으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나타내려고 의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저 인물은 내가 될 수 있고 옆 사람, 아니면 대공황 때문에 길거리에 내다 던져진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찰리 채플린의 의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튼 채플린은 이제 감옥에서 나가야 합니다. 나가려고 하자 오히려 완강하게 거부하는 채플린. 교도소장은 취업 소개장을 주며 아마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선박회사의 배를 완성도 채 되기 전 바다로 내보내는 실수를 하는 등 그는 여전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채플린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저 양떼 같은 사람들 속에 살기에 채플린은 특이하고 빛났다


그 과정에서 채플린과 소녀는 만나게 됩니다! 소녀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빵을 훔치고 결국 걸리고 말죠. 이 때 나타난 채플린. 그는 소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위해 대신 감옥을 가겠다고 합니다. 희생 아닌 희생에 감동 받은 소녀는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시민의 신고로 인해 소녀는 경찰에 잡히고 말죠. 감옥에 대신 못 가게 된 채플린은 크게 실망하고 또 다른 범죄를 저지릅니다. 바로 무전취식이죠. 둘 다 범죄를 저지르니 경찰차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늘도 감복했는지 경찰차는 사고가 나고 둘은 감옥으로부터 도망갑니다.


중산층이 그들의 꿈이었다. 왜 지금과 다를 바가 없는 건지..?


도망을 가며 그들은 중산층의 삶을 엿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좀도둑질, 무전취식과 같은 범죄가 아닌 정상적인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죠. 그들은 중산층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합니다. 중산층이 되겠다는 꿈은 대공황을 겪은 노동자에게는 너무나 큰 꿈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청년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꿈 같습니다..


큰 백화점의 야간 경비가 다치면서 운이 좋게 채플린은 대타로 취직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산층처럼 살기 너무나도 힘듭니다. 위기는 곧 찾아오죠. 채플린이 근무하는 동안 강도가 듭니다. 그런데 그 강도는 이전에 함께 공장에서 일했던 빅 빌(Big Bill)이었습니다! 채플린이 일하는 도중 실수할 때마다 육체의 공간을 침범 당하던 그 노동자 말입니다.


대공황 이후 빅 빌은 강도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선량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보듬지 못한 경제가 그를 그렇게 몰고 갔습니다. 그가 정이 많고 선량한 사람임을 영화는 바로 증명합니다. 채플린이 전 동료인 걸 알아보자마자 강도 행위를 멈추고 함께 술을 마시며 과거를 추억하죠. 물론 그게 채플린이 잘리게 되는 계기가 되기는 하지만...


판잣집이다. 하지만 햇빛이 들어오고 편히 눕는 이 곳이 그야말로 행복 아닐까


과음을 하고 진열대에서 발견된 채플린은 결국 해고되고 맙니다. 그리고 유치장에 10일간 있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소녀가 나타나 말하죠. “새로운 집을 구했어요!”


새로운 집은 낡아빠진 판잣집입니다. 괴어놓은 빗자루를 빼면 천장이 무너질 정도로 낡았죠. 하지만 이들은 행복합니다. 별 반찬 없이도 함께 마주보며 식사를 하며 그것이 행복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 식사 장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초반부 벨로우즈 급식기로 식사하던 장면과 비교해봅시다. 그 장면은 홀로, 그것도 기계에 묶인 채 식사를 합니다. 식사로 사람 간 유대는커녕 자신의 삶을 음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죠.


하지만 이 장면에서의 식사는 '유대'를 나타냅니다. 반찬 가짓수는 벨로우즈 급식기가 많더라도 행복은 비교가 안 됩니다. 오로지 돈이 담긴 경제가 아니라 '사람'이 담긴 삶이란 어떤 것인지 확연히 보여줍니다. 둘의 표정을 보세요. 그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행복합니다. 흑백 영화라도 이 장면만큼은 아름다운 색깔이 칠해진 장면이었습니다.


춤이란 재능을 찾은 소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웃음을 찾아주는 재능을 찾은 채플린


대공황이 잦아들고, 과거 채플린이 일하던 공장이 재개합니다만 파업이 끊이질 않아 벌이가 신통치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녀는 춤 실력을 인정 받아 댄스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되죠. 그 덕분에 채플린도 웨이터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노래도 함께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노래 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일단 잘 할 수 있다고 하고 일을 시작합니다.


다행히도 채플린은 노래를 외우질 못하지만 특유의 센스로 위기를 극복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웃고 행복을 찾죠. 드디어 그의 적성을 찾은 겁니다. 경제 체계가 몰아넣은 공장이 아닌, 그에게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이 삶을 음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동시에 고아원을 가지 않고 국가의 감시망을 빠져놓은 소녀를 소년 선도원들이 찾기 시작합니다. 소년 선도원은 한참 잘 공연하고 있는 채플린과 그녀를 찾으러 레스토랑으로 가죠. 둘은 직업까지 포기하고 끝없이 도망갑니다.


"저 끝에는 행복이 있을 거야"  영화에서 채플린은 말하고 또 말합니다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삶도 망가진 듯 합니다. 소녀는 절망합니다. "살려고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 있죠?" 하지만 채플린은 희망을 노래합니다. "기운 내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걷기 시작합니다. 저 도로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이 있을 거라 그들은 믿고 계속 걷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집니다. "포기하지 말자, 행복을 찾기 위해서."




분장을 지운 찰리 채플린. 그는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면서까지 수치와 사람의 괴리를 줄이려 했다


찰리 채플린은 슬랩스틱의 대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속에 어딘가 모르게 애환이 담겨있습니다. 수치만 보이는 경제와 사람 간의 괴리를 줄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 대공황의 실업률이나 물가 등 뒤에 가려져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단순한 오해에 총을 맞고 죽고 어린 여동생들은 강제로 소년원에 끌려 갑니다. 그냥 웃으며 보기에는 먹먹해지는 영화입니다.


즉,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는 '사람'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렇기에 모던타임즈는 좋은 영화입니다.


경제를 재밌게 다룬 영화를 한 번 다뤄보았는데요! 최근 들어 경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 영화가 하나 더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제 비도 좀 그쳐가지만 그건 폭염을 가져온다는 징조이기도 하죠. 무더위 속에서도 건강 잘 챙겨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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