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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 아이 Sep 01. 2023

지금은 버틸 시기입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우연히 좋은 인연을 만날 때가 있다.

그냥  업무를 한 것뿐인데 유독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이 뭔가 나한테 얻어낼 것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맘이 좀 비뚤어져 있을 수도 있지만 으레 직장에서 만나는 관계란 상부상조, 즉 앞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관계를 쌓아두는 이해타산적인 관계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전사 IT 기획을 총괄하는 여성 임원과 밥을 먹었다. 그 임원(상무님)이 보도자료 배포가 필요한 건에 대해서 우리 부서 상무님께 이야기를 해 주었고, 탑 다운으로 그 업무가 나에게 주어졌다.


보도자료 쓰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여자 상무님과 보도자료 기획을 위해 사전 미팅을 하고 보도자료를 술술 써 내려갔다.

보도자료가 배포된 이후 100건이 넘게 언론에서 그 사안을 다루었고, 나는 우리 부서 상무님의 지침을 받아 보도자료 배포 성과를 리스트업 해서 여자 상무님께 공유드렸다.


내가 이렇게 잘했어요 그러니 수고했다고 얘기해 주세요 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냥 내 업무니깐 위에서 하라고 하니깐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보도자료가 여자 상무님께는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며칠 후 여자 상무님이 우리 실 상무님과 나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한테 잘 보일 일이 있으신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화기애애하지만 또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면서 홍보인의 특성상 나는 앞으로 이 상무님의 부서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빠르게 고민을 했다. 여성인력이 적은 IT 쪽 여성 임원이시니깐 홍보 포인트로는 딱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상무님께는 얼마 전 나갔던 보도자료와 연관해서 언론 인터뷰를 잡으면 한번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밥을 먹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 그것이 홍보인의 삶이고 숙명이지 않냐고 나름 스스로 뿌듯함을 느꼈다.



그날 식사 이후 나는 재빠르게 인터뷰를 해줄 만한 매체에 연락을 해서 보기 좋게 인터뷰를 따왔다. 이렇게 또 성과를 냈다는 것에 뿌듯해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인터뷰 추진이 되고 상무님과 이 건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있을 때쯤 그 상무님이 나에게 차를 마시자고 하는 거였다. 순간 나에게 스치는 생각은 '이 분이 나에게 로비를 하시나, 내가 인터뷰를 어레인지 해주니 나에게 잘 보이고 싶으신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 부서 사람이 차를 마시자는 건 보통 부탁할 일이 있거나, 목적이 있을 때가 많으니깐.


그렇게 어색하게 나간 티 타임. 나는 상무님과 티 테이블 위에 단 둘이 앉아있었다. 나는 단 둘이 차를 마신다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인터뷰 준비를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사진을 어떻게 찍고 포즈는 어떻게 취해달라는 제스처와 함께.


그렇게 업무적인 대화 속에 나름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정서적인 교감이 아닌 업무적인 교감이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업무적인 얘기가 어느 정도 끝나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질 때 즈음 갑자기 나에게 던지는 상무님의 질문이 내 마음에 박혔다.


“000님, 일을 꽤 잘하는 것 같은데 00 회사엔 얼마나 다녔어요? 그리고 000님 꿈이 뭐예요?”


꿈, 꿈이라고요? 15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꿈이라는 단어를 꺼낸 임원이 있었던가. 나에게 준비된 답변은 없었다.


“저는 꿈이 없어요. 제가 직장에서 더 올라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출산도 해야 하고, 올라간다고 해도 저희 부서 임원분들은 여성을 올리려고 하지 않아요”


속내를 들키면 안 되는데, 꿈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녹았던 것일까. 나는 내 속내를 술술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이 더 내 마음을 울렸다.


“000님, 직장생활에선 올라갈 때가 있고 때로는 버티는 시기가 있어요. 물론 저도 랬어요. 지금 00님은 버티는 시기를 보내는 것 같네요. 잘 버티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거예요. 운동도 하고 취미 생활도 꼭 가지고요.”


의례적인 얘기 같지만, '그래 내가 지금 이 시기를 버티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자로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업무 지시를 하려는 상사, 정작 직원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르면서 자기 앞가림만 하려는 상사. 그런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왔다.


내가 그 임원분이 보기에 힘들어 보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꿈, 버티는 시기라는 말에 왠지 성경 말씀을 들은 것처럼 옳거니 하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개인의 커리어,  한 직원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임원들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다.



나는 지금 버티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시기가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지만 그냥 이 버티는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


'올라가면 어떻고, 그냥 직원이면 어때'하는 쿨한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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