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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O May 12. 2023

두 기다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다자이의 <기다리다>


어린 시절 매일 전철역 입구의 계단으로 가서 앉아 있곤 했다. 특정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분명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분명 무언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우연히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 <기다리다>를 읽고 깜짝 놀랐다.



“저는 매일 국철의 작은 역으로 마중을 나갑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맞으러. 저는 매일 여기에 앉아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어떤 사람을? 아니요, 제가 기다리고 있는 건 인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 대체 저는,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요? 확실한 형태를 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다리고 있어요. 누군가 한 명이 웃으며 내게 말을 겁니다. 으으, 무서워 아아, 큰일이다. 제가 기다리고 있는 건 당신이 아니에요. 그럼 대체 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서방님. 아냐. 애인. 아닙니다. 친구. 싫어. 돈. 설마. 망령. 으으, 싫어. 더 온화하고 눈부시게 밝은, 훌륭한 것. 뭔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봄 같은 것. 아니, 아니야. 푸른 잎. 5월. 보리밭을 흐르는 맑은 물. 역시, 아니야. 아아, 하지만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장바구니를 안고 희미하게 떨면서 오로지 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를 잊지 마세요. 매일매일 역에 마중을 나갔다가 허무하게 집으로 되돌아가는 스무 살 아가씨를 비웃지 마시고, 부디 기억해 두세요. 그 작은 역 이름은 구태여 말하지 않겠어요.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언젠가 저를 보겠지요."



이 단편을 읽고 작가가 나를 관찰하고 쓴 글이 아닐까 하는 놀라움과, 내가 겪었던 기다림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는 모두 다 삶의 의미가 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속에 벅찬 설렘으로 가득한 단편 속 주인공과 달리,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의 기다림은 지난하기만 하다. 그들은 자신이 기다리는 고도가 올 것인지 끝없이 의심하지만, 기다림을 그만두지도 못하고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기다리다>의 주인공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으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온다면 기쁘게 맞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주인공은 ‘서방님’, ‘애인’, ‘친구’, ‘돈’이 그것일까 생각해 보고 이내 부정한다. ‘봄’, ‘푸른 잎’, ‘5월’, ‘보리밭을 흐르는 맑은 물’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고 역시 부정한다. 기다림의 대상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계속 이것은 아니다고만 간신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부정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온갖 평범한 것이나 온화하고 따뜻한 것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그래서 나는 이 주인공의 기다림은, 끝내 그 기다림의 대상이 나타나지 않아도 좋은 행복한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다채로운 풍경이 중요한 것처럼, 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에게 그것이 올지 보다, 삶의 의미를 기다리는 과정이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아마도 자신들이 기다리는 삶의 의미를 ‘고도’라는 단 하나의 개념으로 이미 결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고도가 뭔지도 모르고 왜 기다리는지도 모르지만, 마치 누군가가 미리 결정해 놓은 듯이 그들은 자신이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리는 대상이 고도라는 것만 확신한다. 그래서 ‘포조’가 고도는 아닐까 상상할 수 없고, ‘소년’이 고도는 아닐까 상상할 수도 없다. 포조와 소년은 그래서 고도가 아님이 밝혀지는 순간,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기다리다>의 주인공처럼 다양한 것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의 의미로 삼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기다림은 무의미만을 낳지만, 그들은 기다림을 벗어던질 수조차 없다. 사람은 의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심지어 현재의 삶이 의미가 없더라도 언젠가 자신에게 그 의미가 찾아올 거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의 의미나 목표를 언어화해서 미리 정해 놓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하다. 아마도, 극 중에서 암시되어 있듯이 고도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혹은 고도는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에서 부딪치는 갖가지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세심하게 관심을 갖고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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