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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O May 13. 2023

나도 덩달아 늙은 것 같아...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처음 읽은 20대의 나는 시몽을 선택하지 않은 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책을 두 번째로 읽은 30대의 나는 폴을 향해 공감과 연민을 느낀다.  

로제와 시몽을, 바람피우고 배 나온 늙은 남자와, 폴을 사랑하는 잘생긴 젊은 남자로 요약했을 때 폴의 선택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폴에 이입하여 그녀가 피부로 경험하는 것들에 공감하며 읽으니 폴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1.

젊은 시절 로제는 시몽의 어머니와 낭만적 연애를 했다. 그 로맨스는 지금에 와서는 술자리 안주에 불과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가 폴과 시몽의 나이 차와 유사하다는 설정을 고려했을 때, 또 과거의 로제가 시몽처럼 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달했다는 서술을 고려했을 때, 작가가 암시하는 불온한 진실이 드러난다. 시몽은 언젠가 로제가 될 것이다.


2.

시몽은 폴에게 첫눈에 반했다. 굳이 첫눈에 반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 뛰는 사랑을 경험해 봤고, 또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푹 빠져들었던 경험도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시답잖은 이유로 두근거림이 사라지는 경험이 쌓여갈수록, 사랑에 대한 믿음과 기대치는 낮아진다. 이런 유의 사랑의 핵심은 상대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그리고 처음의 두근거림이 가시면, 보이지 않던 상대의 단점과 약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제는 폴에게 심장이 뛰지 않는 시몽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녀의 입가와 눈가의 주름을 발견하고, ‘여성의 나이가 많은 커플은 그 반대보다 비정상적이다.’라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불현듯 떠올리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지나치게 시니컬한 걸까? 계속 “그 여자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네가 너무 아까워.”라는 소리를 듣는 젊은 남자가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적어도 폴은 나보다도 훨씬 구체적으로 그런 장면들을 상상했을 것이다. 폴 입장에서 시몽과의 관계는, 조금만 시간이 흘러가 버리면 언제든 바닥으로 곤두박 칠 관계였을 것이다. 만일 시몽과의 관계가 끝났을 때 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더는 남아 있지 않는다면, 그건 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리스크이다.  


그에 반해 자신을 외롭게 하고 속인다고 해도 로제는 폴에게 끝내 자신 곁에 남으리라는 확신과 안정감을 준다. 따라서 로제와의 관계는, 폴 입장에선 예측이 가능하며 감당이 가능한 리스크이다. 그래서 폴은 불행해질 걸 알면서, 혹은 이미 불행하지만 로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외롭고, 종신 고독형만은 절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20세기 이전의 옛날 소설들에서는 예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남자 주인공,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고 파멸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런 사랑을 멋지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졌으며, “나를 사랑해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어!”라고 외치며 나의 자아와 정신 건강을 관리하는 것을 제일 중요시한다. 사람들은 이제 우연히 상대에게 빠져드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본위로 선택하는 사랑을 한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이미지란 대충 이런 것 아닐까? 멋진 개성을 지닌 사람끼리 서로의 자유와 독립성을 존중하면서, 서로 간에 자아의 성장에 도움을 제공하는 상호 보완적 관계. 그렇지만 언제든 끝낼 수 있는 불안정한 계약관계.


폴은 이혼 후에 일을 하게 된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경제적 능력을 토대로 어느 정도의 자아의 독립성을 유지하기를 원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 폴은 전 남편이 잘생겼고 부자임에도 ‘지독히도 재미가 없어서’ 헤어졌다고 한다. 폴은 파트너를 선택할 때 자아가 잘 관리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다. 폴은 전형적으로 현대의 사랑관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시몽은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상대의 집에서 매일 같이 술에 만취해 있고, ‘존재의 고독 뭐 어쩌고’.... 어디서 흔히 들어봤을 법한 거창한 장광설을 떠들어 댄다. 폴 입장에서 이런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반면 폴은 자신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즉 흔히 볼 수 없는 자아를 가졌다는 점에서 로제를 맘에 들어한다., 로제는 바그너처럼 좋아하는 데 일정한 지식과 교양이 필요한 취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로제는 굉장히 독립적이고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비록 그 독립성과 자유는 폴과의 관계에 대한 무책임으로 이어지지만.... 어쨌든 개성의 밀도를 중시하는 폴의 관점에서 로제는 꽤 매력적인 상대일 수 있다.


4.

폴과 로제 두 사람은 각자 독립적이며 서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놔두자는 암묵적인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로제와 달리 폴은 점점 자신의 자아를 잃어가고 있으며, 자신이 로제와의 관계에서 점차 종속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그 원인을 폴이 감정 관리에 실패했거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성의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통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사랑관은, 마치 연인 관계를 독립적이며 동등한 두 자아의 정신적 만남인 것처럼 꾸미며, 고유한 자아 정체성을 갖추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적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처럼 꾸민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잘 관리된 자아 외에도, 육체의 젊음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폴이 거울 속의 자신이 늙었다고 의식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또 로제는 폴과 시몽의 관계보다 자신과 젊은 여자의 관계가 더 정상적이라고 야유한다. 로제가 젊은 여자와 있을 때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지만 폴과 시몽이 있을 때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처럼, 폴은 소설 속에서 계속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에 쫓기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라는 대사는 단순히 폴에게 새로운 모험을 시도할 만한 열정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로제와의 관계에서조차 폴은 점차 약자가 되어 가는데, 로제보다 훨씬 젊은 시몽과의 관계에서 폴은 끊임없이 자신의 나이를 인식하게 되고,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폴이 아무리 심리 상담이나 오은영 박사님 토크쇼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려 해도, 브람스 바그너를 매일 듣는 힙스터 생활을 통해 고유한 취향을 디자인해도, 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다고 해도, 이 고통은 극복 불가능하다. 자아 관리와는 별도로 젊음은 늘 작용하는 사회적 평가잣대이다.


세월의 흐름은 왜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것일까. 회사 컴퓨터를 켜면 메인 홈페이지에 광고가 뜬다. 그중 단골로 등장하는 기사 제목으로, 모 여배우 40대인데 20대의 미모 뽐내, 50대라고 믿지 못할 잘 관리된 몸매... 이런 것들이 눈에 띈다. 이런 멘트들을 보며 폴의 슬픔은 지금도 여전히 치유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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