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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O May 12. 2023

시지프 신화 읽기

카뮈 <시지프 신화>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카뮈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이 책에서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 체계에 대해 환멸 하는 사람이 보인다. 또 문제 해결은 비겁한 도피이고 오직 문제 상황을 묵묵히 견디는 것만이 영웅적 태도라고 여기는 고집스러운 사람이 보인다. 이중 후자의 특성은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카뮈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이력을 보면, 카뮈는 누가 봐도 망할 수밖에 없는 결혼을 선택했다. 또 좋은 직업적 기회를 마다하고 불안정한 극작가/출판사 직원으로 생활했다. 마치 일부러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것도 아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살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이것이 카뮈가 어떤 숙고 끝에 선택한, 시지프 신화에 담긴 논리에 따르는 삶의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상의 논리는 그 사상가가 가진 직관이나 성격적 특징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카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끝없이 고통을 인내하는 것에서 삶의 위대한 가치를 느끼는 독특한 기질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2.

1장에 따르면 부조리란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인간의 열망과, 비합리적 세계의 간극에 의해 발생한다. 카뮈는 부조리는 제일의 진리이므로, 인간이 부조리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부조리에서 회피하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의 조건에서는 모든 경험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우리는 경험의 질이 아닌 양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

경험의 질을 추구하는 삶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범적 삶이다. 인생에 특정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와 부합하는 일관된 가치 체계에 따라 행동하는 삶 말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마치 소설 속의 인물처럼 모든 말과 행동에 개연성이 있으며, 자신이 선택한 사회적 역할도 잘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카뮈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목표의 노예가 되어 삶을 좁은 울타리에 가둬버린 사람이다.

반면 경험의 양을 추구하는 삶은 어떤 경우에도 미래의 목표를 세우지 않고 현재의 가능성을 소진하는 사람이다. 거창한 말이지만 쉽게 풀이하면, 매 순간 자신이 이전에는 해보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며 경험의 폭을 넓혀 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 거 같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안 가본 길을 정처 없이 산보하는 사람 말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어딘가 자기 계발서에 본 듯한, 안 해본 경험에 도전해 보라는 서술 같다.

그런데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인간이란 결국 어떤 미래의 목표도 없으며 특정한 가치 체계를 지향하지 않아, 과거와 현재의 행동이 일관적이지 않고, 어떤 확고한 자아도 선택하지 않는 사람. 그로 인해 여러 배역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인 거 같다. 자유롭지만 실체가 없는 유령 같다. 보통 확고한 자아는 카뮈가 바로 그토록 비판하는 ‘삶의 목표’를 통해 만들어지니 말이다.

 





3. 몇 가지 궁금증



3.1. 자연주의적 오류

카뮈는 ‘부조리는 본질적인 것이며 진실이므로 그것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를 자신의 사상의 기본 전제로 삼는다. 그런데 무엇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마치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익을 추구하므로 반드시 사익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전형적인 오류 같은데..... 이렇게 전제 자체의 타당성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카뮈가 다른 실존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내용 전체가 설득력이 없다고 느껴졌다. 혹시 내가 뭔가 맥락을 놓친 걸까...?

 



3.2. 부조리는 정말로 해결 불가능한가?

1번에 이어, 부조리가 본질이자 진실이라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지 않은 것 같다. 카뮈가 부조리를 진실/진리/본질이라고 부른 것은, 부조리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지칭한다고 설정했기 때문이다.

p. 52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

하지만 나는 이 말을 그대로 믿지는 못하겠다.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세계는 의미 있지도 않지만 무의미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그 세계는 합리적이지도 않지만 비합리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의미/무의미, 합리/비합리 모두 사람이 부과하는 해석적 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조리를 구성하는 두 항을 인간의 내면으로 모두 옮겨 놓으면, 카뮈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의 내적 감정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적 관계로 오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만일 부조리가 해결 가능한 것이라면, 부조리를 구성하는 두 항 중 하나를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카뮈의 논리가 무너진다. 세계를 이성으로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욕망을 포기한 후설은 탁월하게 부조리를 해결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3.3. 모든 경험의 가치가 같을 때의 모순

마지막 장에서 카뮈는 부조리와 화해하지 않는 시지프의 반항이 삶에 위대한 가치를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냥 시지프가 해내기 어려운 정면 대결을 해냈기에 그의 삶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운명에 대한 도전이 왜 가치가 있지?’ 이 질문은 1장에서 카뮈가 던진, ‘우리는 왜 돈을 벌어야 하지?’라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모든 경험이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카뮈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운명에 도전하는 반항(경험의 양을 추구) 역시 우리의 일상적 행동들(경험의 질을 추구)과 동일한 정도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부조리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여러 태도들 간의 우열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결과 시지프의 저항이 지닌 가치도 사라진다. 카뮈 역시 이 모순을 알고 있었지만, 속 시원한 답을 제시한 것 같지는 않다.

p.94 “어떻게 삶에 모종의 가치 체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모순적이다. 모든 경험에 차별이 없다고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경험의 질 쪽이 아니라) 가장 많은 양의 경험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3.4. ‘영웅 시지프의 삶’의 무매력

카뮈의 희곡 <칼리굴라>는 부조리의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뫼르소와 달리 칼리굴라는 매우 설명적이고 웅변적이라 이해하기 쉬웠다)

황제 칼리굴라는 연인의 죽음을 계기로 불현듯 부조리의 논리를 깨우친다. 이제 그에게는 모든 경험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과 사람들을 죽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덕을 부리며 신하와 백성을 죽이고, 법을 가혹하게 바꾸는 등 부조리의 논리를 극한까지 몰고 나간다. 그는 타인에게 이해 불가능한, 부조리한 자연재해가 되어버린다. 통념적 가치 체계를 내세워 자신의 논리에 대적하는 신하에게 칼리굴라는 말한다.

“행복하고 싶은가. 고작 그것이 하고 싶은가.”

그 대사를 읽고 속으로 덥석 대답해 버렸다. 네. 그렇습니다. 행복하고 싶고 앞으로 제게 의미 있는 것이 올 것이라고 믿고 싶고... 나는 고작 그게 하고 싶습니다.

내 눈에는 부조리의 논리를 극한까지 실현한 칼리굴라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동정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부조리의 논리는 별로 유용해 보이지 않는다. 카뮈도 아마 사람들이 나와 같이 생각할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지프 신화를 다음과 같은 공허한 문장으로 마무리 지은 것이 아닐까?

“행복한 시지프를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할 수 없다.

 

 





4.

앞으로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가 다가올 것이라는 감각은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가 가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는 여러 도구를 사용한다.

그 도구는 내세의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일 수도 있고, 말년에 자식복과 돈복이 좋다는 점사일 수도 있다. 요즘에는 자기 계발서에서 주장하는, 과거의 고통을 통해 성숙한 자아가 완성된다는 자아 성장 서사가 주로 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설령 이런 도구들이 거짓된 것이더라도 삶에서 유용하다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법하다.(나만 그런가?) 그래서 나는 카뮈에게 잘 공감이 가지 않는다.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삶이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을 가져올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구체적으로 정해놓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정할 생각은 없다.

삶의 목표 같은 건 정해놓지 않더라도 삶이 왠지 모를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감각만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굳이 따지면, 내가 사용하는 의미 부여의 도구는 불교/도가 철학의 논리이다. 나는 카뮈가 말하는, 비합리적 도취와 법열의 취향에 이끌리는 사람이다.

이러한 비약의 도구들을 통해 내 삶의 의미 부여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있다. 실은, 설령 결국 삶에 아무 의미가 없던 것으로 밝혀진다 해도 별 상관이 없다. 뭔가 의미 있는 것이 다가온다는 감각은 지금 이 순간 매우 유용하다.



다만 내가 종교성을 띈 취향에 따라 충분한 숙고를 거치지 않고 비약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정신이 희망으로 가득 찬 부동의 세계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한, 모든 것은 정신의 향수가 만들어 내는 통일성 속에서 반영되고 정돈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깨어나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금이 가서 무너진다.”

이와 같은 카뮈의 일침대로 내 삶에서 의미 부여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은, 그리고 내가 세계와 나의 통일성을 직관적으로 믿는 것은, 일부분은 내 인식적 게으름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실토하자면 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록 삶이 더욱 의미로 충만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카뮈의 무덤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지만 당신의 책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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