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 「공(空)의 매혹」
일생에서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었나?
뒷산에서 화면이 박살 난 TV를 발견했을 때.
골목에서 길을 잃고, 눈앞에 들이닥치는 낯선 것들에 숨 막히게 설렜을 때.
선생님이 숨죽여 우는 모습을 훔쳐보며, 그 눈물에 기묘한 슬픔과 매혹을 느꼈을 때.
역 계단에 앉아 오고 가는 모든 것을, 역 통로 너머의 알 수 없는 세계를 올려다봤을 때.
돌이켜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도저히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들이 정말로 나를 결정지었는지 아닌지, 그 순간들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지금에 와서는 알 길이 없다. 그르니에의 말은 옳았다. 이렇게 잊을 수 없는 자취를 남기는 이런 순간들은 대부분 일생이 동터 오르는 순간에 순식간에 들이닥쳤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그르니에는 조금 더 특별한 순간에 대해 회고한다.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 있음을 느꼈으니 말이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길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무(無)의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부하고 충만한 생존의 인상에 바로 잇따라 느끼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그 후 나는 왜 한 가지는 다른 한 가지에 잇따라 나타나는 것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왔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탄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 버릴 판이었다.”
세계가 헛됨을 넘어 비어 있다고 말할 때부터 그르니에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르니에의 입을 통해 나는 내가 겪은 것이 무엇인지를 들었다. 벤치에 누워 하염없이 나뭇잎 사이로 햇빛을 보고 있으면, 그 뒤로 찾아드는 기묘한 순간들이 비어있음과 접촉한 순간들이었다는 걸 말이다. 비록 어린 시절의 나는 거기에 그다지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 기억들은 어린 시절 기억 지층 여기저기에 희뿌였게 걸쳐져 있었지만, 이렇게 묻혀 있던 희미한 기억들을 한꺼번에 엮어서 단번에 부상시킨 강렬한 순간이 20살 즈음에 찾아왔다.
세부 근처의 작은 섬에서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다들 수영을 하러 나가고 나는 혼자 테라스에 기대서, 인적이 없고 해안과 바위 절벽만이 늘어선 섬의 끝을 보고 있었다. 영원히 똑같이 반복될 것만 같은 해안가를 내려 보다가, 내 안에 정적이 찾아왔고, 이내 가깝고 먼 거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그건 모든 것이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간다기보다는, 모든 것의 테두리가 희미해지고 한 덩어리로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평온함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해안가로 뛰쳐나가 파도가 밀려오고 떠나는 모습을 필사적으로 눈에 담았다. 공백 상태에 매료되어, 다시는 거기로부터 되돌아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겪는 사람들, 사건, 나 자신마저 영원 속에서 한순간만 밀려드는 파도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 하나하나의 모양이 서로 다르고 각자가 자신만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내 삶과 내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도 가치가 있다는 게 증명될 거야. 그래서 나는 파도의 물결을 계속 보면서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담을 수 있는 건 겨우 세 번 정도 파도가 오고가는 잔상이었다.
이후로 나에게는 어떤 버릇이 생겼다. 극심한 공포, 분노, 슬픔, 불안 등의 감정이 밀려올 때 나는 잠시 해안가 테라스로 대피한다. 내 앞의 현실적 풍경 위로 비어 있고 숨 막히게 고요한 풍경을 덧씌워 버린다. 그렇게 텅 빈 공백을 마주하고 나면, 모든 것이 희미하게 멀어지고 완벽하게 안전해진다. 다만 동시에 내게서 인간적인 무언가가 조금씩 새어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해안가의 이미지와 나의 현실적 삶을 채널을 바꾸듯이 잇따라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함께할 수는 없을까. 멀리서 비어 있음을 보는 동시에 가까이서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볼 수는 없을까. 내 모든 관심은 거기에 있었다.
21년도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로이 앤더슨의 <끝없음에 관하여>를 보러 갔다. 서로 연관이 없는 사람들의 짧은 사연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 만화경 같은 영화였다. 각각의 사연은 슬프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하고, 기쁘고, 잔인하고, 비참하고, 때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화면이 정적이면서 정말 아름답기는 한데 내가 왜 이런 맥락 파악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 봐야 하는지 모르겠는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점 그조차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나는 멍을 때리면서 각각의 장면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멀리 잡힌 앵글로, 지평선까지 펼쳐진 수풀 위로 난 샛길이 있고, 그 위를 한 대의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나왔다. 중간에 차가 고장이 났는지 운전수는 차에서 내려서 보닛을 열고 차를 고쳤다. 직감적으로 이게 영화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
바람이 불고 풀이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 공백과 마주했다. 더더욱 이상한 일은, 그 상태에서 흔들리는 모든 풀 한 포기 한 포기, 날아가는 새, 하늘, 수평선, 샛길, 운전수와 자동차, 모든 것의 테두리가 생생하고 선명하게 다가왔다는 거다. 차가 고장 나는 것, 차를 고치는 것과 바람에 잠깐 풀이 눕는 것, 이 모두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게 아름다웠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가치 있다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그토록 보기를 원했지만 스스로의 시야로는 닿을 수 없었던 풍경에,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장면장면에 몰입한 끝에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도달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보통은 남자친구와 감상을 나누곤 하지만, 그날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서투르게 말로 설명했다가 그 순간이 왜곡되어 버린다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은 그르니에의 글을 보기 전에는,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기도 했다. 감독의 의도가 궁금해서 여러 평론이나 리뷰 글을 찾아보았지만, 같은 풍경을 보았던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내가 본 그것이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풍경이고, 내가 계속해서 찾아 헤매던 바로 그 풍경이라고 믿는다.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