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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O Jun 18. 2023

살만 해요

박찬국, 사는 게 괴로울 땐 쇼펜하우어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아니 사는 게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은데…라는 배부른 생각이었다. 인생의 특정 시기마다 극심하게 괴로웠던 경험이 있었고 트라우마라고 부를 만한 것도 몇 개 있기 때문에, 과거에 나는 삶이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굉장히 동의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게임으로 치면 일정 수준 이하의 대미지를 차단하는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 캐릭터이다. 그 갑옷은 어떤 고통이 지나가도 결국엔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혹은 스스로 그러지 못할 경우 타인을 비롯하여 세상이 나를 도울 거라는 믿음이다. 혹은 그러한 믿음이 박살나는 경우가 있더라도 시간이 걸릴 뿐 새살이 돋고 나는 이전의 갑옷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또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 중 많은 부분은 스스로가 과거의 고통에 대해서 곱씹거나 미래의 불행을 상상하는 데서 온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나도 매우 동의하기에, 나는 나의 객관적인 상처와 나의 주관적인 고통을 따로 떼어내어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늘 그러려 노력했고, 늘 웃음과 명랑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만일 내 삶에 주어지는 고통의 총량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 그 고통이 가소로워 보일 정도로 내 그릇을 두들겨서 키우면 될 일이다.    



책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내용은 고통의 원인이 의지에 있다는 거다. 돌이켜 보면,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건 항상 무언가를 원하거나 혹은 기피하려는 생각과 감정이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삶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의지의 제거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의 고통에 내가 통렬히 공감하지는 못하기 때문인지, 정말로 의지를 제거할 필요까지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내 자아가 갖는 성취욕, 명예욕, 도덕적 일탈욕,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욕구들을 필요할 때 적절한 만큼 채워 주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걸까. 자아에게 가혹하게 굴지 않고 욕구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그것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크게 낙심하는 것만 피하면 되지 않을까.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하거나 원하는 것이 좌절되었을 때 내 마음을 최대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싶다. 내가 가진 욕망과 기호에 충실하되, 그것에 함몰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돈도 왕창 벌고, 찌질한 짓도 하고, 남몰래 못된 짓도 하고, 완전히 삶에 찌들어 살아가고 싶다. 그 와중에도 내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나를 움직이고 나는 그것으로 인해 어떻게 괴로워하는지 거리를 두고 보고 싶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삶을 마야의 베일로 생각할 수 없다. 욕망에 대한 과도한 억압은 그 욕망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내 삶과 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아사하는 삶이나 수도승의 삶으로 도피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쇼펜하우어가 일시적 구원에 불과하다고 말한 심미적 관조가 금욕보다 좋아 보인다. 내 마음이 변화함에 따라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경험에 크게 경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P.160 “우리가 사물을 아름답게 바라볼 때 그러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사물 자신이다.


 P.162 욕망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고통이지만, 욕망에서 벗어난 순수한 관조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아름다움이다. 욕망에 가득 찬 사람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자신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을 저해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에게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서 욕망에서 벗어난 무심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욕망에 가득 찬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물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세상의 모든 것은 의지에 의해 펼쳐지는 아귀다툼의 장일 수도 있다. 이런 하나하나의 고통을 넘어, 모든 것은 그저 의지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되는 무상한 것이라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왕페이의 <무상(无常)>을 자주 듣는다. 노래를 들으면서 이상한 점은, 무상하다는 건 보통 덧없고 슬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왕페이의 목소리와 가사를 들고 있으면 도저히 그런 메시지를 받을 수는 없다는 거다.    



선선한 밤바람, 흔들리는 나뭇잎과 달빛

구름은 떠가고 나는 생각해요

물은 흐르고 꽃은 향기롭고

마음속에 놓인 한 편의 밤 풍경   



기쁨 속에는 근심이 있고 어둠에는 빛이 있어요

가늠할 수 있나요? 헤아릴 수 있어요?

들판과 구릉

아름다움 속의 처량함   



무상하지요...   



산의 빛깔과 호수의 광채를 봐요

파란 하늘과 하얀 사시나무를 봐요

티끌 하나 없고 아득해요.   



파란 하늘과 푸른 파도를 다시 봐요

저녁노을과 새벽의 빛을 다시 봐요

쉼 없이 숨 가쁘게 변화하죠.

실망에겐 희망을 남겨 줘요.   



이 노래는 결코 영원하지 못한 자연을 보면서, 그것이 변화하는 매 순간 펼쳐지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찬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것이 서로 투쟁해야 하는 자연계가, 각각이 생성하고 소멸해 가는 그 순간 그 덧없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 곡의 제목은 무상(無常)이지만,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제목을 늘 그러함(常)으로 바꿔 주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면 고통이 어떤 잔잔하게 지속되는 아름다운 무언가로 바뀔 거라는 믿음을 내게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고 보는 대상이 자연인 건 비교적 쉽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물에 비해 유독 드러나지 않는다. 달, 바다, 하늘을 보듯 무심하게 다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드러난 그런 경험은 이상하리만치 드물다. 우리는 서로 간에 이해관계로 지독하게 얽혀 있다. 저 사람이 내가 원하는 걸 이루는 데 일말의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저 사람이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 저 사람이 가진 무언가가 나의 기호와 어긋나서 거슬리지는 않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쉽게 정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극히 드물지만 사람에 대해 관조가 일어나는 일도 있긴 했다.


팀원 중 한 명인 P는 유능하고 성실하지만 내가 싫어할 만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은 권위를 추종하며 권위가 부족한 대상의 가치를 쉽게 폄하하는데, 난 그런 태도가 불편하다. 입사 후, P는 직속 상사였던 나의 비위를 과도하게 맞추었는데, 나는 근거 없이 칭찬을 들으면 오히려 심사가 꼬여서 그걸 받아 주지 않았다. 또 P는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 상대를 찍어 누르고 싶어 한다. 은연중에 가르치려는 말투를 쓰며, 인정 욕구와 자기 현시욕 때문에 임원진 앞에서 동료 팀원의 작업물의 흠을 과도하게 잡는 실수를 하곤 했다. 게다가 내가 고치고 싶은 스스로의 단점을 P 역시 가지고 있다는 점도 싫었다. 나처럼 P도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남의 도움을 구하는데 서툴다.


나는 P를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은 그냥 내가 P의 성향을 싫어하는 기호를 타고났기 때문에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뿐, P가 가진 단점은 그냥 다들 각자 가진 단점에 비해 특별히 큰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다. 물론 이것만으로 내가 P에게 가진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 눈치가 빠른 P는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을 거다. 내 앞에서 어딘지 주눅이 들어 행동을 조심했으니까.



회사 워크숍 때의 일이다. 숲에서 자연인 행세를 하는 온갖 닭살스러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그중 하나가 동료 2명씩 짝을 지어서 5분간 가까이에서 눈을 바라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내 짝은 P였는데 사람 얼굴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게 왠지 민망했기에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않으면서 P의 갈색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추는 것, 왼쪽 눈가 아래에 딱지가 앉은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갑자기 딱지 진 모양이 아주 귀여워 보이는 일이 일어났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P한테 그거 다치고 딱지 앉은 거냐고 물어보니까 “흉터 아니고 점인데요ㅠㅠ 저 점박이예요.”라고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후로 P는 나를 굉장히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P가 가진 장점을 이전보다 잘 보게 되었다. 본인이 왜곡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괴로워 하고 있다는 것. 그것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잘되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이 자신을 밀어낸다는 생각 때문에 인정받기 위해 일을 더 많이 더 잘 해내려 발버둥 친다는 것. 인성이든 능력이든 간에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더 개선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것.

이런 장점들이 잘 보이기 시작한 건, P의 눈가의 점이 스스로의 귀여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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