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상담의 두 번째 성과는 남편을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됐다는 점이다.
남편과 시누이는 모두 본인의 부모님을 싫어하면서도,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때때로 감당을 못하는 듯 버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사건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가 지금 이렇게 속상해하잖아!” 소리치면,
“네가 우리 엄마 아빠를 너무 싫어하니까 - “ 같은 말을 내뱉어 싸움의 점화를 당기곤 했다.
남편은 곧잘 부유했지만,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들은 유복했다. 90년대 초 처음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니 하는 소식을 아홉 시 뉴스로 접하며 신기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 바로 몇 년 뒤, 그들은 하와이를 거쳐 라스베이거스로 여행을 떠났다. 90년대에는 드물게 있던 원어민 영어 회화 학원을 다녔고, 내가 “Thank you”따위의 스펠링을 외던 중학교 시절 그는 토플 시험을 봤다.
그리고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경제적으로 그다지 부유하지도, 그다지 초라하지도 않던 내 어린 시절과 상반됐다.
그리고 부모님의 태도도 정반대였다.
우리 엄마 아빠는 주로 ‘내가 친구들과 무슨 놀이를 했는지, 무슨 음악을 듣는지, 학교에서는 무슨 과목이 재밌는지’ 같은 질문을 했다.
12년 동안 한 번도 먼저 성적표를 보자고 강요하지 않으셨다.
“성적이 나쁘면 네가 젤 속상하지. 네가 속상한데 그걸 다시 물을 필요가 뭐가 있어? 다시 잘하면 되지” 했다.
어린 마음에 성적이 나쁜 걸 감추지 못하고, 보여드린 날에도
“이만하면 잘했지” 하며 돈가스를 사주셨다. 난 아직도 시장 끝에 있던 그 돈가스 가게를 잊을 수가 없다.
그다지 좋은 성적이 아닌 걸 물론 알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지. 다시 잘하면 되지’ 싶은 마음이 툭 싹텄다. 용기가 조금 생겼다.
반면, 남편은 공부에서 손을 떼게 됐던 최초의 기억으로 가장 성적이 좋았던 날을 곱씹는다.
평균점수 93점의 대단한 성적표를 들고 뿌듯하게 집에 왔단다. 아마 단단히 칭찬을 듣고, 으스럼을 떨 작정이었겠지.
하지만, 시어머니는 시누이의 99점짜리 성적표와 비교하며 남편을 나무랐단다. 이딴 성적표를 잘도 들고 왔다고 다그쳐댔다.
그래서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고.
일화들은 많았다. 그리고 남편은 그런 일화를 털어놓을 때마다 아주 가끔 있던 신체적인 학대(물건을 던지는 등)와 거의 매일이었던 정서적인 학대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시누이도 마찬가지였다. 정서적 교류가 어려운 본인의 부모님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털어놓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족이었다.
남편은 내가 받는 스트레스에 공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다고!”
공감받지 못한다는 서운함이 더해지면, 나는 더 과격한 표현으로 내 상황과 심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게 바로 남편분의 방어기제일 수 있어요.”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남편의 행동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인 학대에 익숙했던 그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딸깍 - 불 끄듯 신경을 끄는 연습을 했을 거란다.
어린이들이 흔하게 보이는 도피 행위라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 오랜만에 남편이 가엷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나도 처음에는 시부모님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보일 때마다 곧잘 남편이 안쓰럽게 생각했다.
나야,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사람도 많이 만나봤기에 어느 정도 세상에 변수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처음 만나, 우주와 같던 부모들과 소통이 불가능한 걸 느꼈을 때 어린 남편의 세상은 얼마나 깜깜했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감에 허우적댔을까?
처음 몇 년간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내게 닥친 문제가 어이없고 황당해 벅찰 때마다 조금씩 잊고 있었다.
오히려 점점 남편을 탓하고 있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상황을 겪을 일이 있었겠냐고!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잊고 살던 그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부모님과의 문제에서 남편은 적이 아니었다.
훨씬 오랜 시간 학대에 노출되어 마음의 여린 구석에 굳은살이 내려앉은 또 다른 피해자만 내 옆에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