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내가 행복해지는 방식
부당한 일에 맞서려고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례를 목격함으로써 저항이 곧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공식이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겪는 부조리의 경우, 그 프로그래밍은 더욱 유구하고 견고하다.
문득문득 한국 신여성의 대표적 인물로 불리는 나혜석의 일생이 떠오르곤 했다. 한국 여성 최초 서양화가, 작가,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신여성 등의 수식어를 가진 그에 대해 내가 가진 이미지는 ‘시대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행려병자로 생애를 마감한 선구자’였다. 나혜석처럼 재능 많고 똑똑한 사람조차 현실의 벽에 부딪혀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례는 그야말로 ‘기 센 여자는 불행해진다’는 말을 뒷받침하는 것만 같았다. 꽤 오랫동안 이 저주 같은 말이 머리에 남아 있던 탓에 ‘내 목소리’를 내고 싶은 순간마다 자기 검열을 하고 망설여 왔다.
직장인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퍼져 있는 부조리를 겪으며 진절머리가 났다. 어쨌든 생계를 이어가려면 내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참는 편이 낫다고 나를 설득시켰다. 어느 날, 이렇게 참고 살아서 과연 행복한가를 생각하다가 어떤 문장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내 행복은 나답게 살다가 불행해지기’다. 나혜석의 삶을 다시 생각해 봤다. 행려병자로 비참하게 죽는 게 무서운가? 패배주의에 빠져 내 가치관을 관철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게 더 비참하고 무섭다. 내 행복은 나답게 사는 것이다. 비록 나답게 살기가 불행으로 이어지더라도, 그걸 내가 알고 있더라도. 나는 그런 각오를 할 만한 용기와 자아를 가진 사람이다. 이 결론에 도달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 깨달음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바꾼 전환점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막연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나누고 싶다. 행불행은 일차원적이지 않다. 우리는 불행하게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하게 불행할 수도 있다. 이건 단순히 시간적 인과 관계나 새옹지마를 뜻하지 않는다. 행불행은 일시적인 상태이기도 하고, 그 복합체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어떤 것을 자신의 살아가는 태도로 삼을 것인가다. 불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 있고,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과 더불어 소망하는 또 한 가지가 있다면 나의 궤적이 부조리를 없애는 데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는 것이다. 전면에 나선 사회운동까지는 아니어도, 자신답게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격려를 주고받는 것 정도여도 좋다. 그게 나에게는 행복의 상태다.
각오와 선언의 마음을 담아 <나답게 불행해지기로 했다>를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공감과 격려가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