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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Aug 14. 2024

마취 거부 선언

의료 관점이 아닌 상완신경마취총 후기

얼마 전 피부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원래는 간단한 수술이라 생각했는데 재수술이었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소개받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사실 진료 단계에서부터 탐탁지 않았지만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다는 마음에 성급하게 수술을 하기로 했다.


난생 처음으로 상완신경마취총을 경험했다. 수술 전 동의서는 BPB라고 적혀있었다. 신경마취라고 간략한 설명조차 없었기에 막상 수술 전 마취를 할 때가 되어서 엄청나게 당황했다. 어깨쪽에 주사를 놓는데 팔의 여러 부위가 찌릿찌릿하다. 전기고문이 이런 유형의 아픔이겠구나 싶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에 감각이 아예 없어졌다. 국소 마취와는 차원이 다른 무력감이 밀려왔다. 마취 범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전 수술에서 국소 마취를 했을 때는 절개할 때 아프진 않지만 뭔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 신경마취총은 그야말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팔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려고 하면 팔이 마음대로 움직여져서 자칫하다가는 다칠 것 같았다. 마치 팔을 몸통 밑에 둔 자세로 오래 잠을 잤을 때처럼 저린 감각이 마취가 풀릴 때까지 계속된다. (참고로 마취가 풀리는 데에는 12시간 정도 걸렸다.) 피가 안 통할 때처럼 저릿한 느낌이라 손이 차가울 거 같은데 다른 손으로 만져보면 따뜻하다. 정말이지 이상한 감각이었다. 방금 막 세상을 떠난 이의 손을 잡는 것 같은 어딘가 서글픔이 엄습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환자로 병원에 있으면서 이렇게 눈물이 터진 건 난생 처음이었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은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 실질적인 곤란은 이때부터였다. 팔 한 쪽은 마취 상태라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다른 한 쪽은 큰 바늘로 수액을 맞고 있어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팔이 부자유한 상태에서는 치약 뚜껑을 여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헐겁게 묶인 비닐봉투 열기,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기 , 파우치 지퍼 열기, 정수기의 온수 버튼을 눌러 물을 받기 같은 의식조차 해본 적 없는 일상적인 동작들이 하나하나 힘겨웠다. 배리어프리가 왜 필요한지를 피부로 느꼈다. 지금은 건강에 별 문제가 없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건강 약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건강 약자를 위한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임에 틀림없다.


신체적 불편함은 그야말로 힘들고 불편했다. 몸도 마음도.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체적으로 불편해서 생기는 힘듦와 더불어 정체 모를 무력감과 불쾌함이 엄습했다. 이런 불쾌한 무감각을 이렇게 장시간 경험할 바에는 차라리 심하게 아프더라도 마취를 하지 않고 절개 수술을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에 위험이 있거나 통증이 심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마음이 가라앉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납득 가능한 이유를 찾았다. 이건 내가 삶을 살아가는 중심적 태도와 이어져 있었다.


지옥 그 자체인 타인들로 가득찬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체념으로 스스로 감각을 차단하는 이들이 많다. 고통스러운 나머지 마취를 선택한 것이다. 요즘의 도덕불감증 세태를 보다 보면 집단 마취와 다름 없어 보인다. 마취를 하면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대신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기가 어렵고 통각이 무뎌져 더 큰 위험한 징후가 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실제 인간이 통증을 느끼는 이유는 생존 매커니즘에서 비롯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을 지나칠 수 있어서 더 위험하다. 나는 단연 고통스러움을 선택하겠다. 확고하게 결심했다. 이게 요즘 깨달은 내 삶의 핵심 가치관이다. 가벼운 정도의 무뎌짐은 필요하겠지만, 그게 내 의지와 행동력을 앗아가는 조건이라면 거부한다. 그 결과로 수반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더라도. 아픔을 감수하는 이들과 함께 고통의 원인들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하면서, 의지하면서 사는 쪽을 선택하겠다. 이건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거부하는 방식에 가깝다.


마취로 무감각해진 내 팔이 어딘가 가여워서 몇 번을 어루만졌다. 자꾸 울음이 났다. 아마 한동안은 그 감각을 떠올리면 울음이 날 것 같다. 물론 그 울음은 마취된 삶을 살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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