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리뷰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정희진
출판사 교양인
출간일 2023.11.24
페이지 360
책을 읽으며 깊이 공감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찍어서 독서 앱에 남겨두곤 하는데,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면서는 한 줄 한 줄을 모두 기록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저자의 전작인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처음 읽었을 때는 충격의 연속이어서 밑줄을 긋거나 기록을 해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정리하며 읽어야겠다 싶어 플래그 테이프를 두고 재독하다가 거의 매 장마다 붙여서 중도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전작으로부터 약 20년 후에 나온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은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나는 시력은 좋은 편인데 근시가 심한 편이다. 어느 날 친구의 근시용 안경을 써보고 충격을 받았다. 매일 보던 거리의 간판이 이렇게 진한 색인지, 글자가 이렇게나 또렷했는지 처음 알았다. 안경이 필요할 정도의 시력이 아니었기에 내가 보는 시각이 흐릿할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안경을 통해 본 세상은 마치 갑자기 화소가 천 배 정도 높은 고화질 이미지를 보는 듯했다. 정희진 학자의 글이 나에게는 근시용 안경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을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어서 ‘바로 이거구나’하는 경외, 각성,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다루는 담론들은 지금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최대 화두 그 자체다. 바로 지금 성인에게 교과서나 필독도서를 한 권 지정해야 한다면 이 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닌지를 검증하는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인지를 검증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이 처참한 나라 아닌가. 더 답답한 건 정작 이 책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젠더 감수성이 엉망인 이들)일수록 이 책을 읽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을 많은 남성들, 특히 정책 결정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1장과 2장은 이 시대를 살면서 피부로 느껴지는 섹슈얼리티 이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젠더 권력 약자로서 사무치게 겪어왔던 현실들에 대해 적확한 질문을 던지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읽다 보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3장에서 다루는 젠더 개념 해체 부분은 나와 생각이 다른 면도 있었다. 4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 있는 성적 자기 결정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한국 기지촌 여성 운동사에 관한 논문을 실은 부록을 읽고는 기지촌 여성의 존재조차 몰랐던 무지를 반성했다.
성별 구분에 대한 담론을 다룬 3장은 저자와 생각이 다른 부분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별 구분,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 이슈에서 저자는 이런 논란 자체가 인권 침해라고 말한다. 애초에 인간은 생물학적으로조차 양성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혐오는 ‘여성이 남성을 대신해서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말한다. 통념과는 다르게 성별이 이원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가 양성으로 구분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지금 한국에 사는 여성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문제의식 수준과 시궁창 현실의 갭을 가장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누가 여성인지 시스젠더(생물학적으로 양성 구분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시스젠더나 비시스젠더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현시점 통념적 의미에서의 시스젠더와 비시스젠더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겠다) 여성이 정하겠다고 선을 긋게 된 이유는 당장의 자기 방어다. ‘선긋기’는 스스로가 아니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과 불안에서 비롯한다. 실제로 화장실 불법 촬영물에 여성들이 집단 노이로제가 있는데도 여성 화장실을 없애서 모두의 화장실을 만드는 나라에서 급박한 자기 방어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 집단 각성의 계기가 된 강남역 살인 사건이 공용 화장실에서 생긴 일이다. 여기서의 첫 번째 화살은 불법 촬영물을 비롯한 성범죄에 대한 법안 개정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결정자, 남성 화장실이 아닌 여성 화장실을 없애서 모두의 화장실을 만들기로 한 결정자에게 가야 마땅하지, 트랜스젠더 여성이나 비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는 여성에 초점이 먼저 갈 일이 아니다.
양성으로 구분된 사회 시스템을 바꿔가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걸 다수 시스젠더 여성의 불안을 담보로 해서는 안된다. 성을 구분 짓는 잣대를 임의적으로 들이댄다고 지적하기에는 지금 시스젠더 여성들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상태다. 비시스젠더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으로 사회화 과정을 어느 정도 체화한 사람인지에 대한 불신과 불안도 있다. 그야말로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상태다. 그들이 진짜 여성인지 아닌지 정체보다는 이것이 결국 안 그래도 불안하고 힘겨운 여성으로서의 삶에 불안을 가져올 것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더 많다. 만약 비시스젠더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여성이 이 불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성으로서의 연대가 어렵다고 여길 정도로. 이건 누가 더 약자냐를 놓고 다투는 사실상 약자 배틀밖에 안 된다.
여성주의가 가짜 여성과 진짜 여성을 구별하고 배제하는 데에 앞장선다면 그걸 어떻게 여성주의라 할 수 있냐는 저자의 말은 정론이다. 하지만 기존 양성 기반 사회 시스템과 더불어 복잡한 가치가 충돌하는 현실에선 적용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 적용의 어려움을 시스젠더 여성 쪽에 부담시키는 현재의 움직임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내 삶에서 섹슈얼리티가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생리도 싫고 자궁이라는 장기도 싫고 내 몸이나 정신에서 여성이라는 분류 자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궁을 제거하고 내가 나를 무성으로 정체화해도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번째 숫자는 (성별 없음 구분이 없으므로) 바꿀 수가 없다. 섹슈얼리티가 사람과 사회 속에서 주요한 요소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억압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모색하는 수밖에. 체념이라기보다는 수긍에 가깝다. 나의 지난한 여정에 정희진 학자를 이정표로 마주할 수 있는 건 아주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