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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wiseon Jun 29. 2020

나는 만보가 걷고 싶어서

#백만보의시간 시작



내일 비 온다는데 어떡해?
.
.
우산 쓰고 나가야지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재택근무에 집 앞 공원이라도 걷지 않으면 몸이 망가질 것 같아 하루 건너 하루씩 걷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처음엔 창문에 붙여놓은 표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3/3 O, 3/4 X, 3/5 O ···

혼자 걷다 나만큼 걷는 시간을 좋아하는 언니가 떠올라 노을 지는 공원 인증샷을 몇 장 보냈다. 일주일이 지나니 "오늘 걸었어?" 란 말이 안부인사가 되어갔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 걷는 시간이 반복되니 모든지 프로젝트처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질이 꿈틀거렸다. 자주 사용하는 걷기 어플을 유료버전으로 결제하고, 언니와 함께 카카오 100 프로젝트를 활용해 매일 만보씩 걷는 인증을 하기로 했다. 만 걸음씩 백일. 그렇게 백만보의 시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거리 가늠을 할 수 있게 된 건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걷는 순례자의 길(까미노)에서였다. 지도를 보고 걸어도 내가 걷는 길이 얼마나 긴 길인지 체감할 수 없었던 까미노 5일 차. 함께 걷는 동료들이 출발하면 나도 출발하고, 그들이 멈추면 따라 멈췄다.


"난 에스떼야까지 걸을 거야. 여기서 30km는 가야 해. 네가 걷기엔 무리일 거야. 천천히 네 속도로 걸어"



동료의 말에 30km가 와 닿지 않았음에도 걸을 수 있다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차피 길 위에선 모두 각자의 속도로 걷기 때문에 함께 걷는 것도 아니었는데, 무리라고 하니 오기가 생겼나 보다. 난 지구력이 좋으니까 천천히 걸으면 30km는 조금 힘들어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설탕이 뿌려진 빵을 챙기며 걸어보겠다고 했다.



아침엔 영하로 시작해 정오가 되면 얼굴이 익어버리는 스페인의 4월.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지나 경사가 심한 산을 넘어 구비구비 걷는 그 날의 길은 실제 걷는 시간보다 체감 시간이 훨씬 길었다. 물을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 짐을 조금 버렸는데도 무거웠던 6kg의 배낭, 많이 걸어온 것 같은데 아직 반도 못 왔다니. 게다가 중간엔 길을 잘못 들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맙소사.



오후 두 시 정도 되었을까? 평소라면 이미 숙소에 도착해 씻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날의 나는 태양 아래 계속 걷고 있었다. '걷기 초보 주제에 왜 30km를 걷고 있나, 한국에서 상상한 까미노는 걷다가 마음에 드는 마을에 머무는 것 아니었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세상이 싫어졌지만, 지구력이 뭐길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렇게 꼬박 열 시간을 걸어 에스떼야에 도착하고 말았다.



내 걸음으로 열 시간을 걸으면 쉬는 시간을 포함해 30km를 걸을 수 있구나. 30km를 걷는다는 건 하루 종일 걷는다는 뜻이구나. 저녁에 숙소에 도착한다는 뜻이구나. 무리라는 뜻이구나. 한국에서 30km면 어느 정도 거리일까 검색해보니 수원역에서 영등포역까지의 거리였다. 또 한 번 맙소사.


그렇게 나는 이 날의 기억으로 까미노 내내 모든 거리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거리면 내 속도로 몇 시간이 걸리고, 얼마큼 쉬어야 하는지, 내 걷기의 한계점이 어디까지인지. 몸으로 배운 거리감은 절대 잊혀지지 않았다.



 백만보의 시간 일주일 차. 오늘은 왠지 평소 걷는 공원이 아니라 더 멀리 걸어보고 싶었다. 우리 집에서 신도림역 근처의 도림천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하는 호기심에 지도 앱으로 살펴보니 편도 4.5km. 도림천은 걷지 못해도 근처까진 걸을 수 있겠다 싶어 나갈 채비를 했다. 이 정도면 오늘 목표했던 만 보보다는 조금 더 채울 수 있겠지.

새로운 길을 걸으며 '가늠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걸었다. 목표나 기준에 맞는지 안 맞는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는 건 몸으로 배웠을 때 남은 잔상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부딪혀야 알 수 있는 걸까? 부딪히면 남는 잔상과 잔상이 주는 가늠이 있다면 나는 왜 부딪힘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잠깐, 잔상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의 고민은 덮어두고 내일도 만 보를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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