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보의시간 - 36일차의 생각
백만보의 시간 한 달 차, 일상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코로나19가 심각 상태로 격상되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연장되었고, 유럽과 북미 지역에 많은 확진자들이 생겨났다. 뉴스와 팟캐스트에선 종일 경제와 관련된 콘텐츠가 쏟아졌고, 난 국제적 위기상황 속에서 자발적 의지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겨울옷을 모두 봄 옷으로 바꾸고, 자취방 대청소를 한 뒤 부모님의 집으로 내려가 2주간 쉬며 집 앞을 걸었다. 인구밀도가 낮다는 게 이렇게 쾌적하다니. 부모님은 대책 없다며 걱정하셨지만, 물론 나도 재취업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지만, 정해진 것이 없는 나는 오직 하루에 만보만 걸으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지켜야 하는 게 걷는 것뿐이라니.
매일 사람 바글바글한 공원을 걷다가 한적한 부모님 집 앞 트랙을 걷는 일은 지나치게 상쾌했다. 끽해봐야 공원에 있는 열명 남짓한 사람이 전부였으니까. 원래 걷기 명상에서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걷는다지? 만 보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무 생각과 목표 없이, 아무 때나 생각나면 걸었다. 대체로 미루고 미루다 저녁에 걸었지만.
그래서 그런 걸까? 걷는 즐거움보다 달성해야 하는 숫자에만 연연했다. 처음 내가 백만보의 시간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대단한 변화가 아니라 작은 습관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뭐든지 꾸준히 해서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는 느낌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트윗을 보고 결심했었지. 켜켜이 쌓인 시간이 주는 안정감을 알기 때문에 일상에 막연한 안정감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게을러지는 것은 순간이고 게으름은 금세 무기력을 가져다준다. 사실 이 시기에 미래를 담보로 한 무기력이 찾아올까 무서웠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기적인 밍'기적', 걷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놓쳤던 습관의 비밀이 있다. 바로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이었다. 막연한 안정감이 뭔지 스스로 정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습관을 바꾸고 유지하려면 얻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정체성 중심의 습관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살을 빼서 날씬한 몸을 갖기 위해 걷는 `결과 중심의 습관`이 아니라 날씬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서 늘 몸이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정체성 중심의 습관`이 필요한 것. 나는 막연한 안정감이 필요해 걸었는데 실은 혼자만의 생각 정리 시간을 통해 쉽게 무기력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지.
백만보의 시간이 어느덧 1/3을 지났다. 원래는 뒹굴거리다 저녁에 나가 슬금슬금 걸었는데,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운동복을 입고 걸었다. 앞으로는 일어나자마자 걸어서 활기찬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해야지. 자연스럽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좋은 습관과 붙여본다. 나는 쉽게 무기력해지지 않는 사람이 될 테야. 다시 일할 수 있겠지?
4월 14일 (화)
부모님 집에 내려가 둑방길 걷기. 벚꽃이 완전히 지지 않아서 정말 아름다웠다. 흩날리는 꽃잎 밑 벤치에서 책 한 권 읽으면 좋았을걸! 그러나 다음날은 선거일이라 사람이 많을까 봐 가지 않았고, 그다음 날엔 비가 왔지.
4월 19일 (일)
엄마가 이상한 나물을 캐서 만들어준 전. 부침가루가 거의 없어서 전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아무튼 전임!
4월 21일 (화)
연차인 향과 함께 간 청계산. 이 날 바람이 정말 많이 불었다. 다음날은 심지어 강풍주의보.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산 타는 건 좋은데 무릎이 약해 슬프다. 다음엔 등산화와 장갑을 챙기기로 다짐했다.
4월 26일 (일)
다시 서울 집으로 왔다. 해장을 위해 고추짜장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매운 음식 못 먹기로 소문난 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매운 짜장면. 홍콩반점 역사상 가장 맛있는 메뉴가 아닌지?
4월 27일 (월)
공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뷰. 멋진 나무와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어우러져 마치 외국 공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저 나무엔 새가 많기 때문에 벤치에 무심코 앉아있다간 새똥 맞기 십상! (오늘 새똥 맞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