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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목 Jul 23. 2022

사장의 마지막 당부


20대 중반.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나는 뭐든 곧잘 배우려 들었었다. 비록 지금은 술과의 거리감이 꽤나 있는 편이지만 혈기 왕성하던 그 시절에는 맛있는 술을 만들어 먹어보고 싶은 욕망이 차올랐다. 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배우는 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예쁘고 맛있는 술에 대한 호기심이 동한 나는 구인 사이트에서 바텐더를 뽑는 라운지 바에 이력서를 넣었다. 술과 관련한 별다른 경력이 없는 나는 '맛있는 술을 만들고 싶습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기소개서를 적어 냈었다.


'바'라고 하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던 나는 화류계를 상상했다. 그래서 처음엔 발을 딛지 말아야 할 곳에 딛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은 곳들도 있다는 것을 검색하던 도중 알게 되었다.


결국 몇 곳에서 지원서를 보고 연락이 왔다. 혹여 내가 지원한 곳이 같은 화류의 물일까 노심초사하며 첫 면접을 보러 갔다. 문자에 적힌 주소를 따라 설렘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강남 신사동 세로수길 복판에 자리한 바 앞에 섰다. 바의 외관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도심의 한복판 비트감있는 노래가 흘러나오며 화류계의 뉘앙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


면접의 자리에선 경력이 없으니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의지뿐이었다. 열심히 배워보겠노라고 그간 해온 알바의 경력들을 나열하며 한껏 얼굴을 붉히며 어필했다. 아마 사장은 내 얼굴이 그렇게 붉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테다. 라운지 바 답게 환하게 빛나던 주방의 불빛을 빼면 어두컴컴한 실내에 주황빛이 감돌고 있던 곳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바에서 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 바의 사장은 술을 유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직업은 모르겠지만 돈을 펑펑 써대는 이들도 있었다. 사장의 친구에는 바에서 매니저 일을 하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덩치는 산만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게 인상은 제법 험상궂었다. 초반에는 무서운 형 같은 느낌이었지만 세상 순진한 곰 같은 사람이었다.


바에는 사장과, 매니저 그리고 그 둘의 친구 한 명이 더 있었다. 이름은 오래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람보르기니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덩치는 매니저만큼 컸지만 순한 곰 같은 매니저와는 상반되게 건들거림이 생활이 되어있던 사람.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사람에게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바에서 일하게 된 지 5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어느 날부터인지  그 거리감 있는 사람은 바에 노트북 하나를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매일 저녁 구석에 앉아 스페이스바와 마우스 클릭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하던 일이 잘 안 풀렸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게 앞에 나가 연초에 불을 붙이곤 했다. 뻑뻑 내뿜는 담배연기와 함께 욕지거리도 함께 뱉는 그를 보며 몰염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 가게도 아니면서.


그런 그의 노트북 화면을 보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옆자리를 정리하던 나는 웬 화면에 영화에서만 보던 딜러 복장의 여성이 서있나 싶었다. 그랬다. 친구의 가게에 놀러와 주구장창 앉아서 그가 하던 것은 온라인 도박이었다. 그것도 서버가 한국에 있지 않은 불법 해외 도박. 이제 와 생각하니 사장과 매니저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던 것 같다. 처음엔 그들도 그가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을 때면 옆에 다가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그들은 도박꾼이 되어버린 그의 옆에 앉아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도박꾼은 그들에게 도박을 권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걸고 얼마는 버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사장은 그 권유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매니저는 달랐다.


어느 날부턴가 도박꾼의 컴퓨터 앞에는 그가 아닌 덩치가 비슷한 매니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매니저는 도박꾼이 으레 그랬듯 가게 앞에 나가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길 수 있는 도박은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게다가 온라인 도박이니. 낮은 확률도 그렇거니와 딜러가 어떤 수작을 부리더라도 알아채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게에 사장과 매니저, 도박꾼 셋이 언성을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사장은 가게에서 일도 안 하고 도박에 미쳐있는 매니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순하던 매니저를 그렇게 만든 도박꾼은 더더욱 미웠음이 틀림없다.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잃어버린 금액의 숫자들이 귀에 또렷하게 박혀온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예상을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도박꾼은 2억, 매니저는 5천만 원



도박꾼이야 슈퍼카를 타고 다닐만한 재력이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뚜벅이에 바에서 월급 받는 매니저는 무슨 돈이 있어 5천만 원을 날렸다는 말인가. 얼마 전, 매니저가 나에게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150만 원 남짓한 내 월급에서 100만 원만 빌려달라던 부탁. 나도 사정이 좋지 않다며 거절하긴 했지만 다행이었다. 그 100만 원은 도박 자금으로 쓰였을 것이 자명했다.


나는 그날 그들의 눈동자를 보았다. 높은 언성을 뱉어내는 그들의 눈빛은 들개와도 같았다. 한껏 굶주린 들개와 같은 그들의 눈빛 속에는 '한 번만, 한 번만 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이미 묻어버린 금액들 보다 딸 수 있는 금액이 더 커 보이는 욕망에 찬 눈동자들. 도박꾼은 결국 람보르기니를 전당포에 맡기고 다시 그 자금으로 겨우 차를 찾아오는 끈기를 보였다. 매니저는 5천만 원을 잃고 도박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사장은 그 둘을 가게에서 쫓아냈다.


가게에서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친구로 남지 않겠다는 사장과 도박꾼 친구가 되어버린 둘의 뒷모습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한껏 성이 난 채 홀가분한 사장과 친구의 절교 선언에 한껏 성은 났지만 어딘지 모르게 쳐져 있던 그 어깨들. 그날 이후 그들은 원래 몰랐던 사람들처럼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는 듯했다. 나도 그들을 더 이상 보지 못했다.


'바'에서 일을 시작한 지 8개월쯤이 되었을 때였다. 사장은 그날 이후 가게를 접겠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더니 폐업 선언을 했다. 못 볼 꼴을 보여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홀가분함이 보였다. 친구를 잘 사귀라는 당부와 함께 사장과의 연은 끊어졌다.


지금도 어쩌다 신사동에 들르면 일했던 그곳의 자리에 눈길이 간다. 그리고 홀가분해 하던 사장의 마지막 말 역시 그 자리에 아직 맴도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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