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목 Sep 18. 2022

나를 너무 보고 싶어 하지 말길



이번 명절은 본가에 가지 못했다. 수업을 최대한 잡았다. 과외도 미루지 않았고 학원에도 휴강 공지를 요청하지 않았다. 일 핑계를 대고서라도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러 가려들지 않았으니 '못'이 아니라 '안'간 것에 가깝겠다.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서로의 삶에 조언아닌 조언들이 난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요즘은 가족들과 마찰이 잦지 않아 괜찮았을 수도 있겠지만 온 가족들이 모이는 탓에 크고 작은 소란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회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할 수 밖에...


명절은 온 가족이 모여서 밥먹고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가족들에게 어딘지 모를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가고싶지 않은 마음과 달리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이 감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 역시 퇴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찝찝함은 배를 이루었다.


전화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돌아올 잔소리들이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아 정신이 아득해 졌다. 당장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었다. 그렇지만 섣부르게 통화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전화기를 돌려가며 온 가족의 안부를 한번씩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 뻔했다. 피하고 싶었다.


며칠 전 아버지의 퇴임식에 내려갔던 때였다. 어머니의 검은 정장을 챙겨 오라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회색 코트를 챙겨갔다. 장례식 가는 것도 아닌데 꼭 검은 정장을 챙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름 캐주얼하게 입는 것이 더 예쁠 것 같기도 했다. 고민 끝에 고른 옷이었다. 본가로 출발하기 전 거울을 통해 보았을 때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조금 길었던 것 빼고는 말이다.


퇴임식 당일 새벽에 도착한 터라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아침에 눈을 뜨니 집에는 할머니가 와 계셨다. 반가움의 포옹을 했고 얼굴이 좋아보인다는 안부도 나누었다. 시간이 촉박한 듯 싶어 부랴부랴 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불편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 시선의 주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가 챙겨온 회색 코트를 영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다. 여동생이 짧은 치마를 입었을 때를 보던 눈빛이랄까.



깊게 패인 주름들이 세차게 움직이며 할머니가 말했다.

"입어야 할 옷이 있고 입지 말아야 할 옷이 있는거여. 느그 아빠 자켓이나 작은 아빠 자켓을 빌려 입으면 좋겠다."


"됐어"


"그러지 말고 이 할미 말 들어. 그러면 안돼."


"아니 무슨 장례식가? 기껏 예쁘게 챙겨왔구만."



나는 할머니의 잔소리를 멈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평화롭게 따위는 힘들었다. 평화로운 절충점을 찾다가는 결국 할머니의 뜻대로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최대한 단답으로 조목조목 반박해야했다. 누가보면 싸가지 없다며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집은 그런 집안이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입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의 눈빛만이 나를 향했다. 그 무언의 압박에 온통 짜증 가득한 표정과 그만 종용하라는 눈빛으로 응대했다. 집안이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나갈 준비를 하던 동생의  드라이기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화장을 하던 엄마의 손짓도.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이 멈춰서서 나와 할머니를 바라 보았다. 거실에는 할머니와 나의 거친 눈빛으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머님. 그만하십시다. 좋은 날이잖아요."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시간이었다. 마침내 엄마가 그 정적을 깨고 할머니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게 보내는 눈빛에는 성질 부리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기싸움을 멈춘 할머니의 시선은 더이상 나를 향하지 않았다. 대신 애꿎은 TV 화면이 그 눈빛은 온전히 받아 들이고 있었다. 기어코 나는 회색 코트를 집어 들어 입었다. "예쁘기만 하구만"이라는 혼잣말을 붙이면서. 내 기억엔 그 사건이후  할머니와 나는 서로를 향한 대화도, 웃음도 나누지 않았다.


이런 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추석에 다시금 전화를 하고 싶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결국은 전화를 걸었다. 처음 전화를 받은 이는 아버지였고 그 다음은 어머니 차례였다. 보고 싶은데 오지 않은 나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지만 나는  '네, 그러게요, 어쩔 수가 없네요.' 라는 자동응답기와도 같은 멘트를 여러번 반복해서 대답할 뿐이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차례는 빨리 지나갔다. 드디어 피하고 싶은 차례였다. 할머니.



"아니, 내려와서 밥 한끼 하고 내려가는 것이 그리도 어렵냐. 이런 명절에 다같이 모여서 밥도 먹고 좀 쉬었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


"후. 시간이 안나서 어쩔 수 없어요."


"그랴, 몸 건강하게 잘 챙겨먹고."


"예"



다행이었다. 그러나 저 짧은 대화 속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던 내 속을 알고 계셨을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숨으로 짐작하셨을 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할머니의 통화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고 할머니와의 관계도 이러진 않았다. 늘 나에게 이야기하는 결혼, 가족, 명절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에 이런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지. 명절 증후군 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다.


잘 생각해 보면 비단 할머니와의 관계뿐만이 아니었다. 부모님과도 그랬고 친척들과도 그랬다.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가족들과는 달리 나는 함께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었다. 명절이면 한 상에 앉아 밥을 먹어도 허락을 구하고 먼저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나였고. 가족끼리 술을 마셔도 기꺼이 술잔을 물리는 것도 나였다. 언젠가는 이런 나에게 "어른이 되어도 결국 남는 것은 가족이야. 그러니 지금부터 서로 힘들고 해도 시간내서 만나고 살아야지." 라고 고모가 쓴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족끼리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를 한사코 거절했다. 늘 반복되는 가족애의 종용과 거절. 그래서 이런 애착이 더 심해졌을 수도 있다.


성인이 된 후 가족들은 나에게 보다 많은 시간을 내어주고 정을 주길 원했다. 그러나 나는 가족들에게 나를 그만 보고 싶어 하길 바라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아름답지 못한 낙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