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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목 Jan 24. 2023

비슷한 사람


며칠 전 차 안에서 신호 대기를 하고 있던 나는 지나가는 한 노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의 저항을 적게 받으려는 듯이 구부정한 허리를 가진 노인이었다. 삶의 지혜를 온몸으로 얻은 탓이리라. 언덕을 오르는 노인의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발걸음이 고르지는 않았다. 왼발의 보폭은 넓었고 오른발의 보폭은 좁았다. 때로는 왼발을 뻗은 자리 옆에 나란히 오른발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아마 그 노인은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일 것 같았다. 그 노인이 힘든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 언덕은 평소에 내가 산책할 때에 지나가는 언덕이었다. 나에겐 일상인 그 언덕이 노인에겐 북한산을 등반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처럼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그만한 언덕을 오르는 것을 힘들어하는 날이 올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뒷짐을 진 채로 걷는 그 노인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이유는 낯설지 않음 때문이었다. 뒷짐을 진 노인의 손에는 까만 봉다리가 들려있다. 아마도 약을 담은 봉지거나 자그마한 찬거리였겠지. 괜히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봉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인이 입고 있던 짙은 핑크색의 경량 패딩,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프, 숱은 적지만 라면과 비슷한 파마머리 등 모든 것들이 외할머니와 닮았었다.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터져 나온다. 그리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는 노인을 은은한 향을 가졌던, 나무와 같이 늘 삶의 그늘이 되어주던 외할머니로 착각했다.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달려가고 싶었다.


외할머니는 늘 인자했다. 늘 다른 이의 마음을 먼저 앞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불화가 있을 때에도 본인이 더 많은 책임을 지려 노력했고 손자 손녀들에게는 감사함을 표현하던 사람이었다. 화를 내는 모습보다는 웃는 모습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얼굴을 갖고 있기도 했다. 나는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를 그런 면에서 더 좋아했다. (친할머니도 잘 웃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방향의 고집이 억세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세상을 등졌고. 그때부터 외할머니는 혼자였다. 큰 집에서 머무는 것이 민폐만 되는 것 같다며 80 가까운 나이에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엄마에게 외할머니를 말려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할머니의 마음이 편한 쪽으로 하자며 나의 제안을 넘겼다. 그날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엄마에게 따졌다. 나는 행여나 외할머니가 뉴스에서만 보던 고독사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었다.


늦은 나이에 독립한 외할머니의 몸은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노인정에도 자주 나가고 활발한 활동을 하던 외할머니는 해가 갈수록 외할머니의 기운은 노쇠해 갔다. 명절에 아파트 복도까지 구태여 나와 조심히 가라며 주차장을 향해 손을 흔들던 모습은 다섯 번째 해를 마지막으로 볼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반찬을 차려주던 날 보다 외할머니에게 반찬을 차려드리던 날이 점점 당연스럽게 여겨졌다. 언젠가부터는 같은 밥상 위에서 우리가 밥을 먹을 동안 외할머니는 죽을 입에 떠넘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외할머니를 찾았을 때에는 문도 열어주지 못하고 그저 자리에서 힘겹게 앉기만 하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어쩌면 내년엔 외할머니를 볼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외할머니의 부고를 듣던 날. 나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여러 번 찍혀있는 부재중 전화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고 울먹이던 동생의 목소리에서 그 불안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직 외할머니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채 부리나케 목포로 향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외할머니의 사진을 마주한 순간. 나는 무너졌다. 담담하게 “외할머니 안녕.” 따위의 말을 뱉으려던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말은 삼켜지고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은 세상을 흐리게 만들었고 친척들의 얼굴은 모조리 뿌옇게 보였다.


명절을 맞아 추모관을 찾은 날. 자그마한 유리 안에 놓여있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사진들을 잔잔하게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나에게 외할머니를 위해 기도라도 하라는 엄마의 말은 귓바퀴에만 맴돌다 사라졌다. 나는 기도를 하는 것 대신 할머니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아직 나는 외할머니를 마음에서 보내지 못했다. 기도는 마음에서 외할머니를 놓은 후에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사진들 가운데 유일하게 두 사람이 찍혀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외할머니는 내가 만나지 못한 외할아버지와 웃고 있었다.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이란게 저런 것일까. 외할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옆에 있는 외할아버지까지도 평온해 보였다. 살아생전 외할머니가 짓던 웃음을 떠올려 비교해 본다. 우리가 외할머니의 웃음 옆에서 느꼈던 감정은 외할아버지의 평온함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외할머니의 추모관에서 나오는 길. 며칠 전에 거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던 노인이 생각났다. 그러고는 알았다. 길 가던 한 노인의 모습에서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된 것은. 뒷짐을 진 손에 들린 봉투, 패딩, 스카프, 빠글빠글한 머리 때문이 아니었다. 노인이 짓고 있던 웃음을 얼핏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의 것과 비슷하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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