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1
꽤나 여름스러운 햇빛이 내리쬐는 날이다. 사람들은 하나 둘 양산을,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에 나왔고 나는 더운 햇빛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카페에 앉아있는 날이 많아진다. 오늘도 그랬다. 사람이 많지만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카페에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해 하는 터라 웬만해선 안쪽의 편한 자리에 앉고 싶어하지만 오늘 찾아온 카페엔 자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해가 들어오는 카페의 창가에 앉는 수 밖엔 없었다. 창가 자리에 두면서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쪽을 한 번 더 살폈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자리에 앉는 나는 날이 좋다는 핑계를 대어본다. 안쪽 자리가 없어 안쪽 자리에 앉지 못한다는 이유는 너무 사실적이었고 무미건조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폰으로 막고 이제 방금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책상위에 올려 놓았다. 무엇을 할지 장시간의 고민이 이어졌지만 딱히 해야할 것들이 나열되지 않는다. 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은 시끄러운 소리에 금세 접어들어갔다. 유튜브나 영상을 볼까 하는 마음은 어차피 저녁 내내 집에서 보는 것이라 시간을 죽이는 행위에 가까워 책 읽기와 함께 사라졌다. 결국 남은 것은 글에 대한 고민 뿐이었다. 앞선 것들을 하지 않은 여러 핑계들은 차치하고 사실은 6월 30일까지 내야하는 문학상이 4개나 있는 만큼 아직 부족한 글들에 조바심이 좀처럼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남짓한 여유 시간동안 턱을 괴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거리에 다니는 자동차들, 한세월 물건을 내리고 있는 택배 기사, 야외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는 어르신들,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아이들 등이 눈에 들어왔다.
관찰의 시선은 결코 한 공간에 있는 카페의 사람들에게 머물지 못했다. 통유리 하나로 단절되어있는 카페 밖의 공간에 있는 것들에 머물렀다. 카페 안의 사람들을 관찰한다면 그들은 어쩌면 큰 눈을 가진 나의 멍한 시선을 바로 의식하고 눈이 마주칠지도 몰랐다. 그러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딘가 불편한 공기가 나와 그들 사이에 흐르기 시작하겠지. 나는 그런 불편한 공기가 싫었다. 결국 물때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카페 통유리창 뒤편에 숨어 카페 밖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더 나아보였다. 잠깐 눈이 마주치더라도 우리의 공간은 통유리로 단절되어 있었으니까. 불편한 공기가 흐르기 전에 그들은 그저 갈길을 가고 내 앞에 머무르지 않을 테니까.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편할 사람을 물색하던 도중이었다. 햇빛을 쬐며 걷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간에 주름을 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의 동선을 따라 시선이 나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 시선의 끝에는 대각선에서 마주오며 웃음을 띠고있는 어떤 아저씨가 있었다. 어느 대형 포털의 웹툰에서나 볼 법한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손에 들려있는 노란 참외가 눈에 들어왔다. 6개, 7개의 참외가 봉지에 담긴 것을 보니 만원 남짓한 현금을 주고 트럭에서 구매한 것 같았다. 남들보다 시원하게 입은 것도 아니고, 모자나 썬글라스를 쓴 것도 아닌 아저씨는 참외를 들고 웃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시원하게 여름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는 참외를 사서 기쁜 것일까. 참외를 너무 먹고 싶었던 것일까. 혹, 너무 금슬이 좋은 부부라 아내가 먹고 싶어하던 참외를 사가면서 기분이 좋은 것일까. 내가 그를 이렇게 마음껏 재단하며 상상하는 동안 그는 유리창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거리에서 웃으며 지나가던 유일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그를 대상으로 조금은 생산적인 생각을 했음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저씨를 지나보낸 후, 나는 오늘은 자리에 앉아 글을 하나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끄러운 글이든 매끄럽지 않은 글이든 상관 없었다. 글에 불성실한 요즘의 나를 흔들어 주는 날이 되었음 좋을성 싶었다.
막연하게 쓸 내용도 없어, 괜히 블로그에 적어 발행하지 못 한, 저장되어 있는 글감들을 살폈다. 끄적거려놓은 단상의 기억들, 글을 쓸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상황과 감정이라 생각하는 만큼 단상을 적어놓는 순간의 다급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초성만 혹은 중성만 존재하거나 키보드 옆 글자를 알아야만 해석이 가능한 단어들이 적을 당시의 다급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쓰다가는 방금 느끼고 있던 감정의 농도가 옅어지거나 금세 망각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더러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 몇몇 글감을 발견해서 글을 이어가 보았다. 그렇지만 글감을 적던 날의 감정과 오늘의 감정이 사뭇 달랐는지 적어놓은 글감들을 엮어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마치 바느질을 하는데 애먼 구멍만 찔러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기록의 감정과 기억의 감정이 일치하는 날이 오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적혀 가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결국은 이 글을 쓰고 있게 되었다. 카페에 앉아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을 줄 알았던 날 소소한 성공기를 적는다. 적어도 글을 쓰기는 썼고 참외를 든 아저씨를 글감으로 담아도 두었다. 나름 선방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