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면 아픈 버릇이 있다. 평소에는 아프지 않을 것들이 아파온다. 원래 아팠던 것들에는 엄살이 늘기도 한다. 사랑이 나를 유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유약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라서 그렇다. 아프면 관심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 관심은 나를 향한 사랑이라고 느껴졌고 그제야 온몸 안은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반대로 아파도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나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랑의 척도가 아픔에 대한 관심이 되어버린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그 그릇된 척도의 기원은 잘 모르겠으나 원인은 알고 있다. 아플 때를 빼곤 사랑받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유년 시절 때문이다.
그녀를 만나고도 그래왔다. 조금 아프기만 해도 곧 죽을 사람처럼 병석에 누운 목석이 되어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그녀의 걱정 어린 시선이 좋았다. 여전히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몸은 마음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작은 몸살에도 큰 병을 앓는 듯 누워있다 보니 모든 자질구레한 컨디션마저 병으로 느껴진다. 날이 갈수록 소파에 누워있는 날은 많아지고 몸은 점점 더 침전되어간다. 한 번 꺾여버린 기운은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힘든 모양이다. 청소 하나 하고 힘들어하고 설거지 하나 하고 힘들어 다시 몸져 눕는다. 이러한 삶의 반복은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늘 무기력한 모습이 되었고 사랑을 받기 위한 아픔의 노력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아이러니했다.
그녀는 언젠가 내게 말하길 그동안 만났던 누군가들을 선택한 이유를 돌이켜 보면 결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성애의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모성애를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그러나 그 마음에도 어느정도의 한계가 있었나 보다. 슬펐다. 더는 사랑을 받을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 아픈 것은 사랑을 갈구하는 수단에서 사랑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나는 사랑받기를 포기해야 하나 싶어졌다.
“오래 건강해야 함께하지. 아프면 서로에게 민폐야.”
사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주 조금은,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매우 서운했다. 아플 때에 함께 있어 주어야 사랑이지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민폐 끼치지 말고 아프지 마.’라는 의미로 다가왔으니까. 나는 사랑받기 위해선 기꺼이 아프고 싶은 사람인데. 여지껏 나의 아픔은 그녀에겐 민폐스러운 행동인 것이라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그렇게 상처받은 유약한 아이가 되어 며칠을 꿍하게 보냈다. 괜한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니 조금씩은 다른 의미가 마음에 자리 잡는다. 서운함은 덜어지고 알지 못할 감정이 마음에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여지껏 사랑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가 멍해진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해왔는가. 함께하려는 마음보단 사랑을 받기 위한 마음이 훨씬 더 지배적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아, 오래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었구나.
너의 사랑은 조금 더 커졌구나.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한 사랑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제 사랑을 위해 아픔을 내세우는 비겁한 짓은 멈추어야 한다. 좀먹는 벌레와 같이 아픔은 나를 갉아먹고 상대를 갉아먹을 테니까. 새해의 시작과 운동을 다시 다니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이러했다. 아프면 사랑은 줄어들고 신세 한탄만 늘어난다. 건강해야 사랑도 오래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