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우스 Oct 23. 2024

 빵참기

빵을 안 먹은 지 한 달 정도 되었다. 빵을 아주 좋아한다. 특히 달콤한 밤빵을 좋아한다. 추석 때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다녀오고부터 빵을 비롯한 밀가루 음식을 피하고 있다. 마지막날 선교사님이 먹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계란을 먹어도 1 등급란을 먹는 게 좋고 가지, 당근, 해조류처럼 건강한 식재료를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한국에 와서 라면, 빵, 과자 같은 밀가루 인스턴트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 전 정말 빵이 먹고 싶었다. 신기하게 밥을 먹고 배부른 상태가 되면 달달한 게 먹고 싶다. 인생의 미스터리다. 특히 점심밥을 먹고 나면 꼭 아이스크림, 초콜릿, 빵 같은 게 너무나도 먹고 싶다. 정말 신기하다. 분명 배가 부르도록 밥을 먹었는데도 그렇다. 옛말에 밥 배 따로, 군것질 배 따로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에는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도 없지 않는가?


예를 들어, 의사 선생님이 진찰을 할 때, "음, 밥배가 아프군요.", 아니면 "이런, 군것질 배가 아프니, 군것질을 줄이셔야겠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 배는 일원화되어 있다. 분명히 배가 부르면 그만 먹고 싶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도 또 뭔가를 먹고 싶은 건 인생의 미스터리 중에 하나다.


점심을 먹고 길을 걷는데 뚜레쥬르가 보였다. 뚜레쥬르 밤빵은 특히 맛있다. 밤빵이 진심으로 먹고 싶었다. 진정으로. 먹을까 말까 고민했다. 한번 먹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단순한 고민이 아니었다. 밤빵을 먹으면 하늘을 날아갈 듯한 정도는 아니지만 행복감에 젖여 환한 미소가 번져 나올 것 만 같았다. 뚜레쥬르는 큰 밤빵을 1/2 크기로 잘라서도 판다. 그걸 사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밤빵을 사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참았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미노처럼 한번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랬을까?




잠깐 밤빵을 먹는 상상을 해본다. 그 밤빵을 사서 낙엽이 물들고 있는 단풍나무옆 고즈넉한 벤치에 앉는다. 꽈배기처럼 꼬인 황금빛 고정핀을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려서 푼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장된 비닐 안에 들어있던 밤빵의 고소한 향기가 샤넬 no.5 향수처럼 은은하게 퍼지며 내 코의 후각세포를 간지럽힌다. 간지럼을 잘 참지 못하는 나는, 저절로 두 눈이 감긴다. 자칫 잠이 들뻔한다. 코로만 향기를 맡는 것 같지만, 밤빵의 향기는 회오리처럼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서 밤빵 이어폰을 낀 듯 세상을 고요하게 만든다. 밤과 혀가 텔레파시로 대화를 하고, 밤의 초음파에 혀는 침샘 폭죽을 터트리며 격한 환영세리머니를 펼친다. 미니 손가락 하트를 만들듯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이용해 밤빵의 바삭한 표면을 입으로 가져간다. 땅콩버터와 밀가루로 만들어진 겉 표면은 밤쿠키처럼 고소하고 각설탕보다도 달콤하다. 솜이불처럼 폭신한 BODY 안에는 골든레트리버처럼 순하고, 보름달처럼 노-란 밤 다이스들이 보물찾기 게임처럼 숨어있다. 단단한 젤리 같은 밤다이스는 꿀처럼 달고 케이크처럼 부드럽다. 하얀 구름을 두른 황금색 태양 같은 밤 알갱이가 입으로 입장하면 구름은 솜사탕처럼 사르르르 녹아버리고, 혀는 밤으로 된 축구공 놀이를 하다가 목구멍으로 골인을 시켜준다. 이 모든 순간에 밤빵의 향기가 클래식 피아노의 선율처럼 온몸을 감싸안아준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빵, 과자, 라면을 한 달 정도 안 먹으니 몸무게가 2kg 정도 빠졌다. 그리고 턱선이 예전보다 날카로워졌다. 여전히 무뎌 보이는 턱선이지만, 예전처럼 둥글지는 않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과 몸에 살이 찌는 것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 같지만 그래도 살이 찌는 건 싫다. 옷을 입어도 태가 안 나는게 제일 크고, 살이 찌면 왠지 매력이 없어 보인다.


'저 사람은 사는 낙이 먹을 건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도 하나 없나?'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게 죄도 아닌데, 왠지 먹는 걸 좋아하면 자기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것 같고, 게으를 것 같고, 전문적이지도 않을 것 같은 편협한 생각이 있긴 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는 아주 어렵다. 빵, 과자, 라면, 치킨, 햄버거처럼 밀가루로 만들어진 음식을 웬만하면 안 먹기로 다짐을 하고 한 달이 되자 고비가 찾아온 것 같다. 그래도 한 달 동안 자제했다는 건 놀라운 성과라고 본다.


우리가 결심을 할 때는 그 결심을 언제라도 지킬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다. 피곤하고, 배가 미친 듯이 고프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나고, 답답하고, 바쁘고, 고단하게 살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UP & DOWN을 하는 우리 삶에서 일관성을 갖는다는 건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며,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한 일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 어떤 여고생인지, 여중생인가의 전화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자기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누군가 어이없는 언행을 한 모양이었다. 그 일이 그 학생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듯 보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 같았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공부만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신경 쓸게 엄청나게 많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집중하고 신경 써야 하는 건 뭘까 생각이 들었다. 결혼 생각이 번뜩 났다. 결혼을 해야 한다. 더 늦어질수록, 더 힘들어질 것 같은 결혼, 아- 내 짝은 어디 있는가? 공부 잘하는 학생은 다른데 신경 쓰지 않고 공부만 하는 것처럼, 나는 우선 결혼에만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먹고 싶은 빵을 참은 일을 이야기하다 결혼이야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다.  


빵, 과자, 라면, 치킨, 햄버거, 탕수육처럼 맛있는 밀가루 음식들을 참으면서 인내심을 키우다 보면 내 반쪽을 만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푸르름을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