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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Oct 30. 2024

가을의 단상

예전 살던 집 마당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가을이 되면 감나무에 감이 붉은 샹들리에의 유리구슬처럼 열렸다. 가을에 외출을 하고 골목을 돌아 멀리서 집이 보이면 감나무에는 둥글둥글 주먹만 한 붉은 감들이 온 나뭇가지에 가득 매달려 있었다. 골목에서 가장 큰 감나무가 있었기에 우리 집을 알려줄 때 감나무가 있는 집을 찾으라고 했었다. 가을이면 감을 따기 위해 잠자리채처럼 생긴 채가 마당에 서있었다. 양파망을 끼운 두꺼운 둥근 철사를 기다란 장대 끝에 매단 모양이었다. 주로 엄마와 아빠가 감을 땄고 나는 늦잠을 자는 토요일에 가끔 땄었다.


감을 딸 때 가장 중요한 건 감나무가 아주 약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감나무는 보기에는 두껍고 튼튼해 보이지만 굉장히 약해서 쉽게 부러진다. 그래서 함부로 감나무에 올라가면 절대 안 된다. 그런 약한 나무가 그렇게도 많은 열매를 맺는 게 신기하다. 감나무처럼 포도나무도 포도열매를 맺기 전 가지치기를 한 모습은 영 볼품이 없다.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런 열매 나무들을 보면 열매를 맺는 일 외에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의 열매도 비슷하지 않을까?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목표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그 외에는 힘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 같다. 나는 한 가지에 집중을 잘 못하는 성향이 있어서 열매 나무를 보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예전에 학원을 다닐 때, 학원생 중에 이름이 '가을'인예쁜 여자애가 있었고, '동화'인 순한 남자애가 있었다. 둘을 합쳐 부르면 '가을동화'가 되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가을동화'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가 있었던 때였다. 그 학원을 중간에 그만두어서 가을이와 동화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연인이 되었을까? 어쩌면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았을 수 있다. 아니면 애초에 아무런 something도 없었을 수 있다. 가을을 생각하면 가을이와 동화가 생각난다.  


10월의 마지막 밤이란 노래가 있다. 10월 31일 마지막날이 되면 온 매스컴에서 회자되는 노래다. 한 달 동안 작사를 배웠는데, 10월의 마지막 밤 작곡가와 작사가는 10월 마지막날 하루만 해도 저작권료를 많이 받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수업 시간에 노래의 제목이 아주 중요하다고 배웠다. 제목이 특이하고 특별해야 기획사의 눈에 띄어서 선택을 받을 확률이 높고, 청취자들도 재밌는 제목에 먼저 흥미를 갖게 된다고 한다.


10월 마지막 밤이 왜 특별하게 다가올까? 10월이 지나 11월이 되면 한해의 끝이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한 해의 끝은 1년의 끝만 아니라 인생의 끝도 생각하게 만든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은 모두 겨울에 있다. 왜 겨울일까? 겨울은 지난봄의 설렘, 여름의 더위, 가을의 바람 같은 시간들이 지나면서 꽃, 열매, 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혹독한 추위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겨울이 깊어지고 온 세상이 얼어붙어갈 때 새로운 일 년이 시작하고 봄바람이 불고 세상은 녹고 다시 녹음이 펼쳐진다. 한 해의 끝 겨울을 맞이하고 준비해야 하는 신호탄 같은 날이 10월 마지막 밤이 아닐까? 그럼에도 여전히 온 세상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는 가을날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이중적인 특별함이 10월의 마지막 밤에 있는 것 같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가장 큰 가능성을 죽음으로 봤다. 인생의 어떤 가능성보다 가장 명확한 가능성 죽음, 겨울은 죽음을 닮았다. 겨울은 생명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처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가혹하게 대하며 죽음으로 이끈다. 가을은 그런 겨울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생각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갈대처럼 빈약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인간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실존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적인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한다.  


가을은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는 계절이다.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직시하고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다. 지난 시간 동안, 나비에 눈이 팔리고, 나무 아랫사람들의 모습들, 세상의 호기심에 빠져있었다면,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느라 온 힘을 쏟았다면, 가을에는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왜 내가 지금 여기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인생의 열매가 없더라도, 사람들에게 쉼터를 마련해주지 못하더라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죽게 돼버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왜 여기 던져져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끝이자 시작인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가을은 인생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가혹하도록 아름다운 역설적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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