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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Mar 21. 2024

갑질의 갑 기자질 20년 후 여행감독으로 나섰더니...

여행감독으로 전업하고 느낀 점

기자를 20년 하고 여행감독으로 전업한 지 이제 5년 차다. 그중 2/3의 기간은 코로나19로 발이 묶여 지냈고, 본격적으로 출격한 지는 이제 1년 반 정도 되었다. 저널리즘으로 투어리즘으로 넘어온다는 것은 갑의 세계에서 을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인데, 돌이켜보니 아직 기자 때가 덜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의 자질은 단점/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여행감독에게 필요한 능력은 여행지의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과 단점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논리의 세계에서 감성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인데, 아직 한 발이 마저 넘어오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돌아보았다. 20년 기자생활이 남긴 사고와 행동의 버릇이 여행감독인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열 가지를 꼽아 보았다. 이제 오십인데 내가 바뀔 것 같지는 않고, 일단 냉정하게 나를 돌아보려고 한다. 물론 기자의 일과 여행감독의 일은 공통점도 많다. 이 부분은 다음에 정리해 보려고 한다.  



@ 비록 가난한 갑이지만, 20년을 갑으로 살았다.

부유한 을이 될 줄 알았는데, 가난한 을이 되었다. 기자일 때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여행감독의 일은 누릴 것이 있고 누리려는 사람의 취향을 대표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부자연습'을 하고 있다.  


@ 서비스 마인드가 부족하다.

‘아니면 말고’ 정신이 기본으로 탑재해 있다. 그래서 서비스로 승부하는 여행클럽이 아니라 스타일로 승부한다. 우리 스타일의 여행은 이렇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맞는 사람은 함께 하고 아닌 사람은 알아서 떠나게 한다. 이런 나를 이해하고 코드를 맞춰 준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 멤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 여행의 기술은 장점을 보는 기술과 단점을 이해하는 기술인데, 직업상 그 반대의 능력을 키우며 살았다.

기자의 시선은 단점과 문제점을 보는 능력에 특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장점을 보는 능력과 단점을 이해해 주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반대면 여행이 기획될 수가 없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여전히 훈련하고 있다.


@ 설명을 잘하는 것보다 남의 말을 듣는데 익숙하다.

기자는 인용을 좋아한다. 들을만한 얘기를 할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이 말하게 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제는 내 얘기를 직접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에게 충분히 얘기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 평범한 이야기에는 무심한 티가 난다.

기자 때는 ‘들을 만한 얘기를 하는 사람’을 주로 만났는데, 이제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취재원을 만날 때 들을만한 얘기를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시킬 사람인지) 판단하는 버릇이 있어서 빤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 따지는 사람에게 더 따지려고 든다.

워낙 논쟁하던 버릇이 있어놔서. 그냥 들어주는 척만 하면 되는데 상대방의 주장을 논박해 내려한다. 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 들고.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 내가 필요한 때만 연락하고 내가 필요한 것만 묻는다.

기자는 늘 현안을 다룬다. 어제는 어제의 현안이 있고 오늘은 오늘의 현안이 있다. 기자는 늘 오늘을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제를 쉽게 잊는다. 어장관리가 안 되는 스타일인데, 여행클럽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난센스인 것 같다. 평소 두루 연락하고 두루 관리하는 시민운동가가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닥쳐서 해결은 잘하지만 예약하고 세팅하는 것에 마인드가 덜 되어있다.

취재를 할 때, 기획대로 하는 것보다 기획을 배신하는 기사가 더 좋은 기획기사라고 생각했다. 기자의 답은 늘 현장에 있었다. 기획된 대로 쓰는 것은 빤한 기사다. 현장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빤하지 않은 기사가 된다. 그래서 여행에서도 변수를 즐기는 편이다. 여럿이 가는 여행은 세팅이 필수인데 어디까지 세팅할지가 여전히 딜레마다.


@ 낮술을 즐긴다.

다행히 이 버릇은 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여행에서는 좋은 음식에 페어링 된 술이 음식을 더욱 빛나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나라에서만 마실 수 있는 술인 경우가 많고. 하지만 술을 안 마시는 분들도 있고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서 좀 줄이려고 한다.


@ 카투사 출신이지만 영어는 반납하고 제대했다. 군용품인 줄 알고.

공용어인 영어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리스닝이 조금만 불리한 상황, 이를테면 웅웅 거리는 소리로 나오는 구내방송 영어나 원어민이 지 편한 대로 발음을 굴리면 이해가 어렵다. 구글 번역 어플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따져야 할 때는 직접 영어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을 잘 버텨온 것 같다. 기자일 할 때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가 있는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그런 사람들한테서 기사가 나오니까. 이제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가 있는 사람이 찾는 여행감독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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