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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ul 27. 2024

프랑스인의 정신적 미숙 보여주는 파리올림픽

나의 정의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파리올림픽이 점입가경이다. 에어컨 없는 월드컵이라? 각국 선수단은 황새에게 초대받은 여우꼴이 되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초대한 사람도 따라야 한다,라는 프랑스인의 정신적 미숙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PC(Political Correctness)를 과시하며 상대방의 정의 감수성을 나무라는 요즘 MZ 세대의 모습과 똑같다.


뒤로는 원자력 발전소를 하는 대기업의 후원을 받으면서 앞으로는 친환경을 내세우는 이중성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나의 정의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정신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런 프랑스인의 정신적 미숙에 전세계의 짜증지수가 올라가고 있다.


그런 프랑스인들이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사람들이 주장하는 정의를 존중할까? 아니라고 본다. 그곳에 가면 또 그들의 정의가 통하지 않는 것에 통탄할 것이다. 소인배가 티끌만 한 깨달음을 얻고 가르치려는 모습이 지금 프랑스의 모습이다. 기독교문명의 철학적 얕음을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 특히 상대방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다양성의 나라 프랑스는 간데없고 꼰대의 나라 프랑스만 남았다. 올림픽 한 번 열면서 전세계를 가르치려 든다. 좌파의 이런 얕은 근본주의가 프랑스 우파 창궐의 숙주가 되었던 것 같다.


함부로 깨닫는 것은 위험하다. 고행에 가까운 세계일주나 대륙 횡단을 경험한 젊은 여행자들의 특강에 자주 가보았다.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나중에 복기해 보니 힘든 여행 한 번 하고 와서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닫고 온 사람처럼 말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여행은 경험치의 세계라 경험해 보지 못한 ‘지금 여기 우리’에게 경험하고 온 ‘그때 거기 그 사람’은 심리적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여행 한 번 했다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여행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오해의 영역에 가깝다. 여행자의 섣부른 깨달음을 보고 해당 지역을 연구하는 지역학자는 웃을 것이다. 세계 4대 여행서의 공통점이 있다.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내용의 진실성은 물론 저자가 직접 썼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것도 있다. 여행자의 깨달음도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오해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빈번한 PC(Political Correctness) 논쟁을 볼 때도 그런 불편함이 있었다. 자신의 마이너 감수성을 과시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모습을 볼 때다. PC논쟁은 일종의 ‘태도 게임’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약자인 이들에게 이런 민감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그렇지 못한가’ 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낸다.


행동과 실천이 아니라 태도와 감수성으로 우열을 가리는 이런 PC논쟁은 현대판 예송논쟁이라 할 만하다. 예송논쟁은 언제 나타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고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났다. 행동과 실천이 절박하지 않을 때였다. 쓸데없는 국력 낭비였던 이 예송논쟁 이후 조선왕조의 붕당정치는 변질되어 패거리 정치로 전락한다.


PC에 집착하는 이들은 행동하고 실천했던 선배들에게도 거침없다.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의 표현처럼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왔다’고 할 만한 노병들에게 왜 군인의 전투화가 깨끗하지 않은가라고 따져 묻는다. 행동하거나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약자에 대한 감수성 게임에만 열심이다.


약자에 대한 지나친 감수성의 발로로 그들은 당사자가 문제 삼을 필요 없다는 사안에도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태도가 당사자를 ‘이런 침해에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전락시킬 수 있음에도 거기에는 무심하다. 단지 자신의 문제의식을 뽐내려는 그들의 태도는 ‘내가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라는 전제를 달며 충고하는 꼰대들의 변명과 다를 바가 없다.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겨루기 위해 그들은 매번 다른 신상 PC논쟁을 들고 와서 우쭐거린다. ‘나는 이런 것에도 민감하게 느낀다’고 과시한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대접받으려 하는 것이 꼰대의 역학이다. 더 문제의식을 느낀다고 해서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것 역시 꼰대다.


약자에 대한 태도와 감수성이 섬세한 것은 좋은 일이다. 좋은 것은 티 내지 않아도 번지게 되어 있다. 제발 배움을 청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르치려 들지 마라. 그것이 바로 꼰대의 시작이다. 그 판에서 누가 꼰대인지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의심해 보라. 당신이 바로 꼰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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