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추모 다큐멘터리 <피나>를 보고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천재를 기억하는 천재적인 방식'을 보여준다고 감탄했다. 그런 부러움을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보고 해소할 수 있었다. 우리도 드디어 '천재를 추모하는 천재'를 만다게 되었다. 어맨다 김은 방대하고 깊고 복잡한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마치 '백남준이라면 저렇게 했을 것 같은' 방식으로 재정리해준다.
영화의 만듦새가 촘촘했고 방대한 자료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하고 관련 인물에 대한 충실한 인터뷰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백남준의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 백남준이 했던 말들을 곰곰 되새겨 보았다.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는데, 이보다 좋은 지침은 없을 것이다.
백남준에 대해 띄엄띄엄 알았던 사람들은 아래 백남준의 워딩을 읽는다면 갑자기 그가 궁금해질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좋은 답을 찾게 될 것이다.
<백남준 어록>
"미래를 생각하는 건 예술가의 일이다
난 예술가지만 틀에 박힌 예술엔 관심 없다
내 관심은 온 세상에 있다
내게는 매일이 소통의 문제다"
=>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라는 수식어를 어디에 붙여도 의미가 통할 것 같다.
이를테면 '미래를 생각하는 건 여행기획자의 일'이라고 해도 되고.
"예술가는 파괴자예요 우린 사회의 도화선이죠
다음엔 뭘 파괴할지 모르겠어요
나 자신일지도요"
=> 인도 신화에서는 파괴의 신을 창조의 신으로 떠받든다.
모든 창조는 새로운 것을 낳는 일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일이다.
예술이 가진 파괴성에 대해 백남준만큼 온몸으로 보여주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나저러나 안티에 안티였다.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
=> 반성하는 건 천재의 일이다.
천재는 늘 '멋진 변명'으로 스스로를 무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의 안티'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좀 더 헤아려 보아야 할 것 같다.
"미래를 신중히 계획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다른 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때가 오고 있었다"
=> 미래를 예견한 사람들의 결정적 실수는 '너무 앞서갔다'는 것인데,
백남준은 충분히 앞서 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공했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길에서 어떻게 신중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유 있는 실수가 이유 없는 성공보다 낫죠
전 늘 아웃사이더였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 백남준 워딩 중에 가장 멋진 말인 듯.
실수의 이유를 모르면 다시 일어설 수 없고
성공의 비결을 모르면 이를 재현할 수 없다.
"새로움은 진실보다 더 중요해요
새로움은 아름다움보다 중요해요
전 예술을 만들지 않아요 예술이 절 만들죠"
=> '새로움이 나를 자유케 하리라'
지금 하는 일에서 어떤 새로움이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한다.
"방송국을 방해하세요
어떤 방송국 채널로도 바꿀 수 있고
편성표는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워질 겁니다"
=> 지금 편성표는 전화번호부를 넘어서 팔만대장경이 되었다.
유튜브를 보라.
"우린 바다 위 배에 있고
해안이 어디인지 몰라"
=> 모두가 해안이 저기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치려 든다
하지만 이 배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일이다.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게임을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 비빔밥이 바로 한국문화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춰 커스터마이징 한다는 것.
백남준은 최고의 비빔밥을 비볐다.
"20세기를 인류가 자연을 정복하는 시대라고 한다면
21세기는 자연과 인류가 전자매체를 매개로 공생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나는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써 기계를 사용한다"
=> 자연에 도시를 옮기거나
도시에 자연을 끌어들이려 고심하는 현대인들,
여행에서도 중요한 숙제다.
"관객과 예술가 사이의 괴리를 좁히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의 진의이고 인생의 진의가 아닌가"
=> '거리 좁히기'가 바로 소통이다
백남준은 '거리 좁히기'의 귀재였고, 또한 소통의 귀재였다.
모든 소통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부터 굉장히 자유로웠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곳을 가고 싶었다"
=> 천재는 남의 눈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신의 눈만 신경 쓰기에도 바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