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된장 단지를 들여다보면 큰 주걱이 퍼내어 움푹 파였었다. 어린시절에 본 풍경이지만 아직도 선명하다. 3대를 이룬 대가족이던 우리 가족은 서울의 작은 단독주택에 살았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그다지 눈에 띄게 크거나, 모양새가 두드러지지는 않은 어슷비슷한 집의 하나였다. 그래도 장독대는 서로 달랐지 싶다.
뒷마당의 담벼락에는 몇 개의 단을 쌓아 올린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에 가까이 가면 몇 가지가 뒤섞인 고리한 장 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자주 나와 천으로 닦아 투박한 모양새와 달리 햇볕아래 항아리는 늘 반짝반짝했다. 주로 독 가운데 중간 크기의 독에 간장, 된장 등이 담겨 있었고, 작은 독에는 알지 못하는 장아찌, 소금, 때로 김치가 들어 있었다.
장독 사이를 돌아보면 제일 뒤에 큰 항아리는 다 텅 비어 있었다. 손으로 치면 마치 둔탁한 악기처럼 신비한 소리가 났다. 장독대를 쓸고 닦고 관리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몇 해를 더 그 집에서 살았다. 장독대 관리는 엄마의 소관이 되었고. 할머니 생전과 비슷한 맛의 찌개며 국이 여전히 밥상에 올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K-외딸인 내게 장독대 관리의 책임이 조금씩 넘어왔다. 주로 학교에서 돌아와 오후 볕이 지나갔으면 장독 뚜껑을 덮으라는 의무였다. 가끔은 단 걸음에 달려 나가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주로 아침에 볕이 났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의 일이다. 급하게 울리는 검은 전화의 수화기를 받아 들면,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얼른 이 전화 끊고 뒷마당에 나가 항아리 뚜껑 좀 닫으렴.”
문제는 장독대에서 내가 목격하는 ‘소확도’였다. 항아리 뚜껑을 닫으러 가보면 고추장, 된장이 커다란 주걱으로 움퍽 파여 있었다. 간장이나 소금 등은 항아리 독 안에 눈금을 그어놓지 않는 한 줄어들었는지 여부를 알아낼 재간은 없다. 엄마는 식탁에 올려놓은 작은 고추장 종지도 먹고 나면 사용하지 않은 수저로 잘 다듬어 놓는 게 자동회로처럼 몸에 밴 사람이다. 그러므로 푹 떠간 손이 엄마의 손 일리는 절대로 없다.
‘퍼 가려면 티 나지 않게라도 퍼 가던지’
혼자 중얼거리며 항아리 뚜껑을 닫았다. 누구의 손길인지 물증은 없었다. 집에 살림을 도와주러 오는 아줌마도 있었고, 아래채도 있었지만 알 수는 없다. 엄마도 누구에게 묻지 않았다.
한때 ‘소확횡’이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이 미디어에 등장했었다. 봉지 커피, 볼펜, 복사지 등 사소하지만 확실한 횡령을 인증(?)하는 사진이었다. 그것을 보며 문득 움푹 파인 고추장, 된장 단지가 생각났다. 세상에 크고 작은 횡령이 넘쳐난다. 그렇게 많은 액수의 횡령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소식도 종종 접한다.
조선 중종대 사간원 사간을 지낸 문신 곽순(郭珣, 1502-1545)은 '작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함부로 남에게 취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지푸라기조차 몰래 가지지 않는 양심이 있다. 우리의 도덕성은 어디까지 타락한 것일까.
※ 곽순의 묘지명에는 “성격이 굳고 깨끗하며, 행실은 뜻은 개결하고 그 행실은 청렴하여, 지푸라기 하나도 함부로 남에게 취하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갈암집》25. 한국고전종합DB.
※ 《월간 에세이》, 2024년 2월호에 게재된 원고를 브런치에 맞게 적당히 수정했습니다.
※ 그림 출처 : 《엄마의 담장》, 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