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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녀와 목덜미의 기억

by SeonChoi

은비녀를 꽂던 할머니의 머리칼이,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졌다. 평생 가위가 닿지 않은 긴 머리였다. 촘촘한 참빗으로 빗어 쪽을 지어 단단히 틀어 올리고, 반짝이는 은비녀를 꽂던 그 머리칼. 나는 곁에 앉아 긴 머리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은비녀를 만지작 거리곤 했었다.


옛 여인들도 머리 꾸밈을 좋아했다. 자신의 머리 외에 다른 머리를 얹거나 덧붙이는 가체가 성행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즈음 풍성한 가체를 좋아해서 구름을 포갠 듯 안개를 두른 듯이 하느라 걸핏하면 천금을 들인다. 나이 어린 부녀자들은 목이 약해서 감당하지 못하는데도 가체가 작은 것을 싫어하니, 영조 때는 이 풍속을 금지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가체로 꾸미는 사치가 성행하자 영조가 이를 금했고, 정조 12년에는 다시 《신금사목》이 반포될 정도였다.


내 할머니 머리도 그랬다. 가체라 해도 될 정도로 풍성했었다. 그런데 그날,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는 쪽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다. 뒷목에는 짧은 머리카락만이 비죽비죽 솟아 있었다. 아침 식사 중 갑자기 찾아온 풍이 할머니의 오른쪽을 마비시키고, 머리칼도 뺏아가 버렸다. 할머니는 그 모습으로 8년을 더 사셨다. 할머니 손에서 빗나던 참빗과 은비녀는 화장대 서랍에 들어가 점점 퇴색했고, 끝내 자취를 감췄다.


커트 머리한 할머니의 목덜미를 처음 본 그 충격은 나에게 오래 남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단발을 강요당했던 학창 시절을 빼고는 늘 긴 머리다. 숱이 많아 여름마다 고역이지만, 쉽게 가위를 대지 못한다. 할머니의 그림자가 내 머릿결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나 역시 늙은 어느 날에 머리를 싹둑 자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에 아마도 나는 참빗에 배인 세월을 떠올리며, 반짝이는 은비녀 하나를 조용히 가슴에 꽂아 두게 될 것 같다.


그림출처 : 최선혜, 『슬픔도 미움도 아픔도 오후엔 갤거야』,흐름, 2021, 23쪽.

인용문 출처 : 『고운당필기』 2, 「가체를 금하다」(禁髢),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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