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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걷는다

- 사연 하나씩 품고, 한걸음 또 한걸음

by SeonChoi

“마지막 장을 끝낸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족들 몰래 울었다.”


박경리 작가의 『시장과 전장』 - 전쟁과 시장이라는 두 축으로 한국전쟁을 직조한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나를 진흙탕에 빠지게 했다. 작가가 펼쳐놓은 참혹한 전쟁,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생존, 목숨을 가르는 이념으로 날을 세웠던 인간들. 다 읽고 나니, 온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듯 무겁고 축축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양재천으로 이어지는 도심의 숲길은 제법 흙냄새와 풀내음이 배어 있었다. 가을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박경리 작가는 저 문장에 이어 다음과 같이 썼다.


“전쟁의 상처는 아무 곳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을 얼핏 둘러보면, 그런 듯 보이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는 볼 발간 사춘기 소녀 시절,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 상처는 나이테처럼 해마다 겹겹이 새겨지고 굳어져, 구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각인되어 있다. 어머니는 전쟁을 다룬 어떤 이야기에도 등을 돌리신다.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하던 어느 날, 함께 보자 청했을 때 단호한 한마디가 돌아왔다.

“안 갈란다.”


이어 흘리듯 한 마디를 보탰다.


“겪은 일만도 끔찍한데, 그 아픈 기억을 뭐하러 다시 헤집누..”


돌아앉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오래된 우물 밑바닥처럼 깊고 차가웠다.


전쟁의 상처는, 어머니의 몸과 기억 속에, 깊고 조용히 새겨져 있었다.


아, 이 땅의 상처는 언제 어떻게 풀어질 수 있을까. 삼국의 전쟁이 그 뒤 신라에서 고려로, 다시 조선으로 이어지는 시간 정도 흘러야, 서로 겨눴던 총부리를 역사책 속의 문장으로만 읽게 될까.


가을이 깊어 간다. 여름의 온갖 사연을 뒤로하고, 계절은 성큼성큼 나아간다. 전쟁의 참화부터, 어제 생긴 손끝의 상처, 마음의 생채기까지, 이불을 쓰고 울고 싶은 사연들이 서늘한 바람에 실려 훌훌 떠나갔으면 좋겠다.


꺼내기엔 너무 아픈, 아니 차마 다시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연, 그 모든 것을 품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간다. 우리는 모두 사연 하나씩 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제 길을 걷는다. 흙냄새 스민 오솔길 위, 바람에 실려 사연이 흩어진다. 큰 숨을 한번 쉬어 보며, 오늘도 조용히, 한걸음 한걸음 내 몫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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