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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미술관, 평가받지 않는 연남의 화방

by 데이트베이스

연남동의 작은 골목에 위치한 성수미술관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성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연남동에 자리 잡은 이곳은 전국에 여러 지점을 둔 미술 체험 공간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대형 프랜차이즈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동네 어귀에 숨겨진 작은 화방 같은 친밀감이 물씬 풍겼다. 처음부터 체인을 의도했다면 굳이 ‘성수’라는 동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을 편안히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그림이란 묘한 긴장감을 준다. 빈 캔버스를 마주하는 일은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 가능성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그림은 자유가 아닌 ‘과제’가 되어 버린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미술 학원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좁은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느꼈던 중압감은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완전히 지우고 싶었다. 평가받기 위해 반복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창의적 행위가 아니라 기술적 숙달이었다. 미술대학 입학과 동시에 나는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평가받지 않는 그림을 그릴 기회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 여자친구와 방문한 성수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순간,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바로 ‘자유’였다. 이곳에서는 빈 캔버스 대신 명확한 실루엣 도안이 주어진다. 내가 할 일은 아크릴 물감을 선택해 도안을 채색하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제한적이라고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제약이 오히려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의성이라는 건 무한한 선택지가 아니라, 적절한 제약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아크릴화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성수미술관의 체험 방식 또한 탁월했는데, 2시간이라는 기본 체험 시간은 뒤에 웨이팅이 없을 경우 자유롭게 연장할 수 있었다. 창작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경험이었다.


공간 내부의 분위기 역시 창의성에 기여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텍스쳐가 살아있는 벽면 마감과 바닥에 흩어진 물감 얼룩들, 그리고 자연스러운 생활감을 드러내는 소품들은 깨끗하게 정돈된 미술 교실의 경직성을 부드럽게 무너뜨렸다. 여기서는 누구도 내 그림을 평가하지 않았다. 작품을 완성한 후의 채점이나 피드백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곳의 그림 그리기는 ‘평가’가 아닌 ‘놀이’가 되었다. 자유롭게 선택한 색들이 도안 위에서 섞이고 번지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이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사람으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성수미술관은 원데이 클래스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한 공간이었다. 도예나 베이킹과 같은 원데이 클래스는 사실상 직업인에게는 항상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지만, 이를 즐기는 소비자에게는 신선하고 가치 있는 경험이다. 그 아이러니가 이곳에서 절묘하게 녹아들었다. 입시미술에서 가장 귀찮았던 팔레트 청소나 물감 보충 등의 뒷정리 과정을 모두 직원들이 처리해 주기에, 참가자들은 오롯이 그림 그리는 재미있는 과정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평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그림은 다시 흥미로운 놀이로 돌아온다. 물론,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 가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여기에선 그것조차 부담이 아니었다. 아무도 나를 ‘미대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친구와 서로의 그림을 비교하며 웃을 수 있었던 것도, 그날 우리가 처음으로 그림이라는 ‘놀이’를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다양한 형태의 체험형 콘텐츠가 각광받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드는 과정 자체가 주는 만족감 때문이다. 똑같은 카페나 식당을 반복적으로 찾는 것보다, 무언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훨씬 기억에 오래 남는다. 성수미술관은 그런 맥락에서 이색 데이트 콘텐츠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누군가의 노동을 누군가의 놀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 그 경계가 흐려질 때 경험은 더욱 깊어진다.


한참 말없이 열중하며 그림을 그리던 도중, 여자친구가 “너만 잘 그리려고 하네.”라며 장난 섞인 눈치를 줬다. 미대생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어느새 나 혼자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진짜 즐거움이 찾아온다. 결국 그림이라는 것도, 공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을 때, 평가의 시선이 사라질 때, 그때 진짜 창의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성수미술관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이런 인사이트를 남겼다. 좋은 공간은 단지 예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인식 자체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나의 경우에는 미술은 스트레스받는 평가의 대상 -> 데이트 콘텐츠). 공간의 진짜 가치는 이런 순간들을 얼마나 많이 설계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평가가 아닌 가능성을 설계한 곳, 성수미술관은 나에게 진정한 그림의 의미를 다시 알려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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